역자는 인류학자도 민속학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네츠 인들의 문화와 이 책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러시아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큰 감동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툰드라에서는 세 살배기 어린 꼬마도 영하 40도의 추운 겨울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천막 밖으로 나가 설원을 향해 자신만의 리듬으로 지난밤의 이야기를 읊어댄다고 한다. “오, 어머니 대자연이시어, 지난밤 나의 순록이 사라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형식적인 면에서 그 시는 투박할지 모르나,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네네츠 꼬마의 언어에는 대자연과의 영적 소통이 느껴진다. 이런 식으로 비록 활자화되지는 않았지만 모든 네네츠 인들은 자신만의 구전시를 수 백 편씩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가히 세계에서 가장 문학적인 민족, 진정으로 시가 생활의 일부인 민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현재 지구상에서 유일한 순록유목민족으로 남아있는 툰드라 네네츠 인들의 민요에 관한 연구서이다. 본래의 책제목은 『네네츠 민요 속의 세계상』(2007)으로, 구전민요를 통해 네네츠 인들의 우주관, 자연관, 언어관, 전통문화, 역사, 풍습 등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 시도이다. 이 책의 특징이라면 거의 러시아 학자들에 의해 진행되어 온 기존의 연구서와는 달리, 마흔 살까지 네네츠 부족원의 한 사람으로 거친 툰드라 유목생활을 직접 체험한 네네츠 출신 학자의 첫 결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은 유럽적 방법론과 축적된 성과를 활용하면서도 거기에서 늘 빗겨나 있으며, 저자 자신도 네네츠 문화를 보호하고 전승시키려는 샤먼적 사명 의식에 충만해 있기도 하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는 러시아 어로 쓰여 있지만, 예시된 수많은 민요 작품들은 러시아 문자를 차용한 네네츠 어로 병기되어 있다. 이때 저자는 번역이 불가능한 용어는 네네츠 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러시아 어로 번역된 용어라 할지라도 언어학적 민속학적 기원을 통해 본원적 개념에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서술은 네네츠 문화에 생소한 우리들에게는 매우 장황하거나 낯설게 여겨질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어 한 단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역자 역시 상당한 곤혹스러움에 직면해야 했다. 따라서 행여 필요 없다고 여겨질 네네츠 단어의 경우라도 원음을 살리도록 영문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한편, 우리들로선 네네츠 언어 규칙이나 단어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도 없기 때문에 러시아 문자로 음역된 네네츠 문장들을 본문에서 과감하게 생략했다.
이 책은 1장에서 네네츠 인들의 우주관, 세계관, 남성적 집단문화 현상으로서의 하사바됴바, 순록가죽으로 만든 이동식 천막의 의미를, 2장에서 민요 속에 나타나는 여러 존재들을, 3장에서는 우주 에너지로 이해되는 신비한 단어/바다의 형식에 따라 분류되는 민요장르들을, 4장에서는 샤먼의 형상과 주술용으로 사용되는 북의 의미와 기능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루는 대부분의 민요 작품들은 일반 민중들로부터 채집된 것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이 샤먼이나 민요의 연행자들이 오랫동안 보존해온 작품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시된 작품들이 흔히 비현실적이거나 비약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샤먼이 되는 과정에서 앓는 무병 이야기나 샤먼들의 꿈과 언어 이야기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지만, 저자는 혹독한 대자연 속에서 살아남은 네네츠 인들의 문화적 본질이 바로 샤먼 문화임을 은연중 내비치고 있다.
한 사석에서 저자 푸쉬카료바는 네네츠 어와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한국 단어가 있지 않느냐고 역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녀의 질문에는 우랄-알타이 어를 사용하는 네네츠 인들과 한국인들이 동일한 민족적 기원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는 확신이 들어 있었다. 내가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발견한 유사한 단어는 ‘할머니’라는 의미의 ‘야마니’라는 단어뿐이었다. 그것은 역자의 언어학적 시야가 그만큼 좁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이 어떤 독자를 만나고 어떤 학문적 성과로 발전해갈지는 현재로선 미지수이지만, 인류학적, 민속학적, 언어학적, 문학적 가치를 지닌 소중한 자료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역자의 말 중에서
네네츠인들에 관한 첫 문헌은 B.C. 11세기 말에 기록된 러시아 연대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때부터 네네츠인들은 빠짐없이 역사 속에 등장했다. 1787년 I.파테르는 네네츠 구전문학의 완벽한 첫 전형인 「바다 하소보 Vada xasovo」를 상트-페테르스부르그에서 출판했다. 그리고 그 책은 일정한 수준의 체계적 수집과 연구가 가능하게 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로부터 2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주제적 구성과 시적 층위,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난 일정한 사회 현상 등이 묘사된 신뢰할만한 상당한 수준의 연구 자료들이 수집되었다.
과학적 패러다임의 현대적 변화는 자연과학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속학분야에서도 정신문화 연구에 일부 중요한 수정을 가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이 탐구하는 정신문화 분야는 인간의 심리-의식적, 심리-생리학적 특성과 연계된 종교적 행위나 지식과 관련된다. 세계상, 우주관 그리고 그 구조나 거주자들에 관한 관념은 주위사람들에게 신비한 초월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의 직접적 영향, 즉 샤먼과 혜안을 가진 사람들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현실에 대한 그들의 인식적 특징, 다른 의식 세계로 빠져드는 그들의 능력, 인간의 그런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근거들은 전통적 세계관에 대한 분석 문제를 다시금 재고하게 만든다. 몇몇 민요 장르들에 대한 분석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용과 형식은 그런 지식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것이다. 네네츠 인들의 민요-민속적 전통이 여전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한, 수집 작업이나 분석 작업의 방법론적 정밀성은 현단계에서 이론적 의미나 실용적 의미에 있어 대단히 절박하다.
이 연구 자료들은 야말-네네츠, 네네츠, 타이므이르(돌가노-네네츠) 자치주와 한티-만시 자치주의 유가 시(市)에서 확정된 바 있다(유사한 자료들이 많았으므로 자료의 비교와 고증을 통해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로 확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것은 18-20세기경에 메모된 대표적인 연구 자료들이다. 이 기간 동안에 민속학적 연구, 언어학적 연구, 민요 연구 등이 세상에 나왔다. 연구자들이 네네츠 인들의 모든 민요 장르의 텍스트들을 확정하던 이 무렵에는 채집된 민족 창작물의 모델들에 관한 과학적 분석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