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도...가장 비겁했던 순간이 있었죠. 지금까지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몇번이고, 그 책임을 아프게 되씹으면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에 괴로워했죠. 다행히도 이번엔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군요. 어쩌면 그건 오이지스에게 주어진 행운이겠죠. 그런 점에서 전 그가 부럽습니다. 가끔은...그걸 돌이킬 수만 있다면 가진 것 전부를 지불하더라도 아깝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비록 제가 가진 것은 별 것이 없지만.......'
오이지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프넨(보리스)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기억 속의 소년으로 되돌아가듯 고통스러워졌다. 제로가 보기에도 그것은 그 나이 소년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제가 어떻게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제게 누구도 뼛속 깊이 미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지워지지 않는 원한이나 원망 따위는 검은 등불을 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지 않아도 제 삶은 이미 충분히 어둡습니다. 오히려 밝은 불을 몇 개 켜야 할 정도로요.'
--- p.192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그 말을 모두 듣고 있었으나 고개를 돌아보거나 하지는 안았다.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오이지스가 말을 맺기도 전부터 연신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양쪽 입끝이 약간 실룩 거렸다.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가 비웃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이었다. 그래, 이 자책은 이제 지겨울 정도다. 도대체 몇 번째인가. 감정이 가는 대로 이끌려 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결과를 자초하는 일은 없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 도대체 몇 번째인가. 그가 마음을 놓을 때마다 벌어졌던 최악의 사건들이 그만큼이나 교훈을 주었는데도, 이처럼 작은 일에서조차 결국은 실수를 해버리는 구나.
이런 결과가 된다는 것,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 않나?
--- pp.121-122
배가 서서히 물 위로 떠가는 것을 보며 보리스는 큰 배를 탔을 때와는 다른 서늘한 공포감을 느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이 나무로 만든 뱃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끝없이 깊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날씨는 코가 맹맹해질 정도로 추웠다. 이 배는 뒤집히지는 않는 걸까, 또는 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어쩌나. 그러나 누구한테 매달려 불안감을 토로할 만한 입장은 되지 못했다. 두 남자는 모두 이 자그마한 배가 안전히 떠가도록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앉은 보리스는 배의 몸체를 치고 지나가는 물결들조차 자신의 몸에 부딪쳐 오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엘베 섬과 이어지는 화이트 크리스탈 제도 가운데서도 물방울 열도라고 불리는 곳의 첫 번째 섬이었다. 그들은 섬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항해했다. 작고 날씬한 배는 물굽이를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가끔 그들이 탄 것과 비슷한 배가 수평선 쪽에서 지나가는 것을 볼 때도 있었다. 본래 이렇게 만들어져 팔리는 배의 목적은 근해의 고기잡이와 더불어 이곳 해역만의 특별한 돈벌이라 할 수 있는 유물 건지기였다.
약 30여 년 전에 일단의 어부들에 의해서 작은 대리석 석상이 건져진 일이 있었다. 석상의 눈에는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고, 손톱과 머리장식을 비롯한 장신구들은 온통 황금색이었다. 이것이 고대 마법 왕국의 유물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탐색 열풍이 갑작스레 불었고, 초기에는 렘므 왕가에서도 수색선을 파견하는 둥 부산을 떨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큰 성과는 없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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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보리스는 몇몇 사람들이 그토록 진절머리나게 이야기했던 뱃멀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평생 처음으로 타본 배는 나르닛사에서 탄 알탄 시그머 호였고, 그것이 비교적 큰 배여서 괜찮았던 거라며 이 배는 흔들림이 많은 작은 돛단배였다. 너무 긴장해 있어서 오히려 그런 것을 느낄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어쨋든 그는 낯설고 험한 환경에 이상스럽게 잘 적응하는 고산식물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노마라드 땅에 가서 갑작스레 쑥쑥 자랐던 일, 그리고 처음 겪는 렘므의 추위에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튼튼했던 것처럼 환경에 낯가림하지 않는 체질의 소유자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 음식이나 불만 없이 잘 먹고, 불편한 잠자리에서도 잘 잠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 pp.5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