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도 입장에 따라서는 ‘저것’이 아닌 것이 없고, 어떤 것도 입장에 따라서는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 ‘저것’의 입장에서 ‘저것’을 보면 ‘저것’이 ‘저것’으로 보이지 않고 ‘이것’으로 보인다. 오직 ‘이것’에서 ‘저것’을 볼 때만 ‘저것’이 ‘저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에 인하여 성립된다. ‘저것’과 ‘이것’은 상대적으로 생겨난 개념이다.--- p.11
사람의 몸은 원래 자연물이다. 자연으로 생겨난 조그만 단세포가 세포분열을 거듭하며 차츰 자라 현재의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연물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쉬며, 밤이 되면 자고, 아침이 되면 일어난다. 쉼 없이 숨을 쉬고, 심장이 박동하며, 자라고 늙고 병들어간다. 이 모든 것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삶을 자기가 운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p.17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낸 의식의 세계에서 살고 자기가 만들어낸 가치기준에 따라서 삶을 영위한다. 그런데 자기가 만들어낸 의식의 세계는 유한하고 추구하는 가치도 유한하다. 그러므로 무한한 세계와 무한한 가치에서 본다면 인간의 삶은 극히 조그만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은 우물 안 개구리다.--- p.38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의식을 가지고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에서 살아간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 교육제도를 만들어 그 제도 속에서 살아간다.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만들고 장관이란 직책을 만들며, 사장이란 직책을 만들고 선생이란 제도를 만든다. 그리고는 그 직책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전력투구한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는 것과 같다.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가상으로 부모 역할과 의사 역할, 두목 역할을 만들어 놓고 역할을 분담하여 실제인 것처럼 흉내 내며 재미나게 노는 것이 바로 소꿉장난이다. 소꿉장난을 하던 아이가 지나가던 어른에게 함께 놀자고 한다면 어른은 어떻게 하겠는가?--- p.51
참된 사람은 본래 모습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의식에서 만들어낸 일체의 가치와 시비판단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인이다. 그에게는 삶과 죽음이 따로 없다. 사는 것도 자연이고, 죽는 것도 자연이다. 그의 삶은 태양처럼 따뜻하고 바람처럼 시원하며, 물이 흐르듯 유연하고 바위처럼 꿋꿋하다. 그에게는 인간세상의 삶이 마치 꿈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린이의 소꿉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출세하는 것이 달갑지도 않고, 몰락하는 것이 슬프지도 않다. 유유히 와서 유유히 살다가 유유히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