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는 105호로 다시 돌아가면서 나야의 사건수면의 원인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몽유병이나 야경증은 아이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아이와 부모가 두려워할 만한 일이었다. 잠결에 걸어 다니는 현상은 의학적으로 몽유병이라고 불리는 증상으로, 환자가 부상당할 위험이 매우 높았다. 그렇기에 피터는 더더욱 나야의 증상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피터는 나야의 증상이 야경증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외래환자 실습을 할 때 야경증 환자를 본 적이 있었다. 환자는 열두 살의 남자아이였는데, 한밤중에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비명을 지르는 증상을 보였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옆방에 자고 있던 동생이 까무러치게 놀랄 정도였다. 아이는 이런 증상을 보일 때마다 땀을 심하게 흘렸고, 심박동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아이는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어 곧 터질 것만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의 동생은 오빠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고 했다.
나야는 어쩌면 어린 시절에 생길 수 있는 악몽장애를 겪고 있는지도 몰랐다. 밤중에 발작을 일으키는 특이한 증상의 측두간질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었다. 나야는 확실히 뇌전도 검사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환자를 진단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환자와 대화하는 일이었다. 만약 나야가 대화에 응해준다면 바로 그 일이 우선이었다.---pp.60-61
“제가 위에서 뭘 봤는지 아세요?” 레이아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며 다급하게 말했다. “일단 코끼리 바위가 사람의 머리라고 가정을 해보세요.”
호세와 스티븐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계속해서 레이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런 다음 몸통, 팔, 다리, 손가락, 발가락에 해당하는 곳들을 따라 선을 그려보세요. 뭐가 나오죠?”
“음.” 호세가 말했다. “봉선화(머리 부분은 원, 사지와 체구는 직선으로 나타낸 인체 그림) 모양이 나오는군요.”
“바로 그거에요.” 레이아가 말했다.
“무슨 뜻이죠?” 형사가 물었다.
“그게 바로 제가 위에서 본 것이에요. 우리가 오늘 아침에 꽂은 깃발들을 모두 연결하면 아주 거대한 봉선화 모양이 나와요.”
“대체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장난이란 말이야?” 스티븐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티븐은 제닛의 부모에게 비보를 전하고 온 뒤로 급격하게 늙어버린 것 같았다. 레이아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서 멍든 듯한 눈 아랫살과 깊게 패인 이마의 주름살을 발견했다. “그보다도 왜 이런 어린 소녀를 살해한 걸까요? 그뿐 아니라 아이의 몸을 이렇게….” 스티븐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첫 번째 의문점조차도 해결할 수가 없군요.” 스티븐이 두 손의 엄지로 눈을 비볐다.
“사진사에게 위에서 본 장면을 인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레이아가 멀어지며 말했다. “사진이 준비되면 뵙죠.”---pp.128-129
레이아는 이게 과연 연쇄 살인인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두 사건의 범인이 동일 인물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결코 흔히 볼 수 있는 살인범의 소행도 아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사건을 모방했을 가능성도 적었다. 게다가 모방 살인은 보통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건을 대상으로 따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사건은 잊혀진 지 꽤 오래된 것이었다.
호세와 스티븐은 레이아의 의견을 듣고 당혹스러웠다. “어째서 두 살인 사건이 연쇄 살인범의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호세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레이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형사님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두 사건 사이의 시간 간격과 시신이 유기된 방법으로 봤을 때, 연쇄 살인범의 소행인 것 같지는 않아요. 제 생각에는 지금 저희가 다루고 있는 이번 사건의 범인은 종교적인 의식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 같아요.”
“뭐가 다른 거죠?” 스티븐은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
레이아가 웃음을 지었다. “연쇄 살인범은 특정 기간에 걸쳐 세 명 이상의 피해자를 살해하죠. 그리고 보통 피해자를 고문한 뒤에 천천히 죽입니다. 그런 부류의 살인범은 가학을 통해 쾌감을 얻어요. 살인한 뒤에 오는 쾌감을 즐기는 거죠. 자존심이 있는 살인범이라면 그런 미술적인 방식으로 시신을 보여주려고 애쓰진 않아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뒤에 범행을 저지른 걸까요?” 스티븐이 큰 소리로 물었다.
“그것도 30년씩이나요!” 호세가 외쳤다.---pp.193-194
노예는 두 손의 손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쪽 손에 작은 흠집만 제외하면 아주 깨끗한 피부였다. 그는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아난시는 결국 화를 푼 것이 분명했다. 감사해요, 아난시. 제 기도를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노예는 땅바닥에 누워 안심하는 마음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귀를 잔뜩 기울였지만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은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안전하게 도망쳐왔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붙잡혔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땅바닥에 편안히 머리를 기대며 누웠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경계심을 풀면 늘 그랬듯 아난시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아난시, 아난시, 아난시…. 그 이름은 마치 북소리 장단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의 중심에는 바로 그 이름이 있었다. 노예는 아난시의 기척을 다시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곧 아난시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난시는 실제로 존재했을 뿐 아니라 아주 강했다. 노예는 자신의 삶을 아난시에게 바치며 평생을 그의 노예로 살고 있었다.
그는 아난시를 만나기 전의 삶을 떠올려 보았다. 아난시를 만나기 전에 그는 노예가 아니라 한 소년이었다.---pp.228-229
피터는 입을 떡 벌린 채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물에 잡힌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확실히 이런 충격이나 불신을 많이 겪어온 이엔가 씨는 그저 담담했다. 그는 피터가 진정할 때까지 온화한 얼굴로 피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전생에 데비 샌더스였다는 말씀이신가요?” 피터가 겨우 말을 꺼냈다. “지금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믿을 수 없는 얘기겠지만 맞아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그람 선생님이 나야와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것 같네요.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만이 범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라요.”
피터는 그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엔가 씨의 얘기가 완전하게 이해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피터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속으로 생각했다. 이상한 일은 지금까지도 충분히 겪은 게 아니었나? 이번 주에 일어난 일들을 도저히 하나도 믿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제가 이해하는 게 맞는지 확실히 해야겠어요.” 피터가 다소 반항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선들이 제가 전생에 관절마다 조각나서 살해된 흔적이란 말씀이시죠?”
“그래요.” 이엔가 씨는 완전히 확신하는 투로 말했다. “데비 샌더스의 영혼은 피터 그람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전생의 흔적이 남게 된 거죠. 그 자국들은 그람 선생님이 전생에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순간에 몸에 생긴 흔적일 거예요.” 이엔가 씨가 명확하게 설명했다.
“정말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네요.” 피터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잔뜩 고뇌하며 말했다.
“가끔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일들이 벌어지게 마련이죠. 그리고 그 원인에 의심을 품지 말고 받아들여야만 할 때가 있답니다.” 이엔가 씨가 조심스럽게 피터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pp.394-395
노예는 문 밖에서 나는 찰랑거리는 열쇠 소리에 깜짝 놀랐다. 멍하니 넋을 잃고 있던 그는 정신을 차려 고개를 똑바로 세웠다. 노예는 허둥지둥 하며 들고 있던 그림을 침대 위에 던져놓았다. 그리고는 방금 들린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거실로 달려갔다. 그때, 철컥 하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지는 동시에 문이 열렸다. 노예는 공포에 질린 채 침실로 급히 도망가서 숨을 곳을 찾았다. 그는 방을 재빨리 훑어보다가 구석에서 큰 벽장을 발견했다. 그는 곧장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간 뒤, 문을 반쯤 닫았다.
노예는 방금 들어온 불청객이 얼른 떠나기를 기다리며 숨을 죽인 채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먼지 때문에 코가 씰룩거렸다. 앞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 거리고 있었다. 피터는 지금 직장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지금 집에 들어온 사람이 피터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지?
그때, 그 불청객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림자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와 침실용 탁자 앞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노예는 그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슬쩍 확인하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놀랍게도 그곳엔 피터가 서 있었다. 피터는 신분증 카드를 집어 재킷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침대에 기대며 노예가 떨어뜨린 종이를 집어 들었다.
피터는 순식간에 나가버렸다. 노예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옷장 밖으로 나왔다. 손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지만 조금씩 기분이 나아졌다. 옷장이 너무 꽉 막혔던 탓에 거의 들킬 뻔했지만, 다행히도 겨우겨우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노예는 거실로 가서 커튼 사이로 창밖을 엿보았다. 이윽고 피터가 주차장에 세워 둔 빨간색 지프차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노예는 피터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pp.413-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