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혜암 선사의 가르침과 법어를 받은 불자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재가 수행모임. 혜암 선사는 입적을 눈앞에 둔 1986년 5월 15일 재가 불자들이 이 땅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터전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도록 '견우회(見牛會)'란 명칭과 게송을 함께 내리시었다. 학송 법사의 지도 아래 견우회를 이끌라 하시고, 애석하게도 동년 5월 19일 입적하시었다. 견우회 회원들은 스승의 유훈을 받들어 오늘날까지 참선법회를 이어오고 있다. 법회는 불자모임의 요청이 있으면 수시로 열리고 있으며, 정기법회는 견우회 및 마하법회(회장 삼보행) 로서 매월 둘째·넷째 일요일 오후 1시 30분 조계사 불교대학교육관 2층 4강의실에서 열린다. 다음카페 견우회 우담바라(cafe.daum.net/UDAMBARA).
감수 : 묘봉 스님
본은 평산이요, 속명이 동욱으로 임오(壬午: 1942)생이다. 수덕사 만공 스님 제자 덕산대호 선사를 은사로 울진 불영사에서 득도하고, 1972년부터 해외 포교를 하다 잠시 귀국해서 1984년 덕숭총림 초대 방장 혜암(慧菴) 스님으로부터 수법(受法) 제자가 되었다. 공주 신원사와 서울 화계사 등에 주석하였으며 다양하고 절묘한 설법을 구사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 현재 공주 영평사 염화실에 주석하며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에, 《눈 없는 돌사람이 글자 없는 책을 읽는다》《선문촬요》《육조 법보단경》《조사선에로의 길》《철학의 파멸》등이 있다.
…만공 스님이 손가락으로 불상을 가리키며 “부처님 젖이 저렇게 크시니 수좌들이 굶지는 않겠구나” 라고 했다. 곁에 있던 혜암 스님이 “무슨 복으로 부처님 젖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만공 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무슨 복을 그렇게 지었는가?” 혜암 스님이 답했다. “복을 짓지 않고는 그 젖을 먹을 수 없습니다.” 또 다시 만공 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혜암 수좌가 부처님을 건드리기만 하고 젖을 먹지는 못하는군.” 당시 혜암은 만공 스님의 질문에 답을 못했다고 한다. 훗날 혜암 스님은 “부처님의 젖을 먹는 흉내를 냈어야 했는데……” 라고 회고했다.
…덕숭총림 수덕사 범종불사 회향법회 당시 혜암 스님의 법문은 불자들의 정진을 독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종소리에 깨달으면, 북소리에 거꾸러진다” 고 한 뒤에 “대중은 각기 한마디씩 일러 보아라” 고 했지만 대중은 아무 말을 못했다. 이에 스님은 “만약 나에게 뜻을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면서 주먹을 들어 보인 후 법문을 이어갔다. “이렇게 펴는 것이 옳으면 손을 이렇게 쥐는 것이 그르지 않노라.”
…“선(禪)의 종자를 미국에도 심어주어야 할 것 아닌가? 종자만 심어주면 가지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거야 저절로 되리라 생각해.”(불교신문 인터뷰) 세수 100세에 미국 포교를 위해 손수 나섰던 혜암 스님이 출국 직전에 하신 말씀. 이때 스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인과 교민들에게 불법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여해 ‘선의 가르침’을 서양세계에 전했던 것이다. 당시 스님은 미국에 가기 전에 매주 수덕사를 찾아오는 한 교수를 통해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보다 쉽게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나이를 뛰어넘은 열정을 직접 보여주었던 것이다.
…“너는 너라는 그 ‘너’가 아니요, 나는 나라는 그 ‘나’가 아니라, 나와 너 둘이 없는 그곳에, 즉시 본래의 너와 나로다.”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다.” “슬플 것도 슬프지 않을 것도 없다. 일체를 여읜 자리에는 그 생각마저 없는 것이야.”
…“범부란 재주가 모자라거나 재력·권력이 없는 이가 아니다.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공평하게 있는 불성이 있는데, 깨닫지 못하는 자가 바로 범부이다.”
…“참선에는 구별이 없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발심해서 정진하는 이가 가장 수승하다.”
…나는 오십 년을 공들였다. 이십 년은 별로 모르겠고, 삼십 년 되니까 스승 없는 지혜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