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은 내게 참으로 고마운 시절 인연을 안겨주었다.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는 말씀이 진실임을 터득하였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며 자유롭고 홀가분하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을 뜻한다. 불일암에서 지낸 몇년 보다도 훨씬 신선하고 즐겁고 복된 나날을 누릴수 있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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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떠나기
뜰가에 서 있는 후박나무가 마지막 한잎마저 떨쳐버리고 빈 가지만 남았다 바라보기에도 얼마나 홀가분하고 시원한지 모르겠다. 이따금 그 빈 가지에 박새와 산까치가 날아와 쉬다 간다. 부도 앞에 있는 벗나무도 붉게 물들었던 잎을 죄다 떨구고 묵묵히 서 있다. 우물가 은행나무도 어느새 미끈한 알몸이다.
잎을 떨쳐버리고 빈 가지로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자신도 떨쳐버릴 것이 없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무들에 견주어볼 때 우리 인간들은 단순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하며, 건강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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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나 물질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생활수단이다. 그러나 필요한 분량, 즉 생존적 소유를 넘고서도 나누어 가질 줄 모르면 불행의 씨가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너무 긁어 모으거나 지나치게 소비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 일이나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사회의 불균형은 초래하기 때문에 악이 되는 것이다. 영어에서 사유(私有)를 뜻한 'Private'란 말은 '빼앗는다는 뜻인 라틴어'Privare'에서 온 말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한편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그만큼 부자유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질 때 우리들의 정신은 그만큼 부담스러우며 이웃에게 시기심과 질투와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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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시끄러운 세상에 살면서 직업을 선택하게 됐다면, 청소차를 몰거나 가구를 만드는 목수일을 하게 됐을 것이다. 청소차를 몰고 다니면서 묵묵히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으면, 절이나 교회에서 행하는 그 어떤 종교의식보다도 훨씬 신선하고 건강하고 또한 거룩하게 느껴진다.
연장을 가지고 똑닥거리는 목수일은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재미가 있어야 순간순간 사는 일이 즐겁고 그 자체가 삶의 충만이다. 그리고 투박하고 서투르지만 손수 만든 도구나 가구를 쓰고 있으면 그때마다 삶의 잔잔한 기쁨이 우러나온다.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