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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대기행, 바람의 제국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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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대기행, 바람의 제국을 가다

출연: 손요(방송인),문성재(중국문학 번역가), 내레이션: 이규화, 연출: 김인영, 정일환 | 미디어우토 | 2013년 05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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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13년 05월 20일
시간/무게/크기 300분 | 크기확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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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교양/역사/동양사/아시아/다큐/다큐멘터리 ■ 등급: 전체이용가 ■ 지역코드: All NTSC ■ 화면비율: 16:9 ■ 사운드: 2.0 Stereo ■ 언어: 한국어 ■ 디스크수: 5DISC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1부 운명을 바꾼 유목민 - 흉노



만리장성 이북의 오랑캐에 불과했던 유목민족들 중 최초로 유목 제국을 세우고, 천하의 진시황과 한무제를 두려움에 떨게 한 흉노! 당시 강력한 위력의 활과 철제무기, 마구를 동반한 흉노의 막강한 기병을 막을 수 있었던 부대들은 없었다. 한나라는 흉노와의 굴욕적인 화친정책을 통해 오랑캐라 여겼던 흉노에게 공물을 바쳐왔고, 심지어 한나라 원제의 후궁이었던 왕소군은 화친조약에 의해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가게 된다. 한무제의 흉노에 대한 두려움은 흉노를 짓밟고 있는 말의 모습을 한 석상인 ‘마답흉노상’에서도 볼 수 있다.



흉노를 두려워했던 것은 한무제 뿐만이 아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장성이자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된 만리장성은 사실 최초로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이 흉노의 침입을 두려워해서 쌓은 것이다. 또한 당시 가장 용맹한 기마전사로 불렸던 흉노는 스키타이의 발달된 철기문화를 제일 먼저 받아들여, 강력한 활과 철제무기로 최고의 강대국을 이룩했다.

그리고 농경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북방 유목문화의 특징인 치열한 내부 경쟁은 흉노를 더욱 단단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안정만을 추구하는 아버지 두만 선우와 한발 더 나아가 큰 제국을 건설하고자하는 아들 묵돌의 정치적 대립은 단순한 부자지간의 정권 쟁탈전이 아니라 흉노 제국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다. 결국 묵돌은 아버지를 죽이는 치열한 내부 경쟁을 거쳐 선우에 오르게 됐고, 그로인해 흉노는 이는 북방사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흉노도 제국의 흥망성쇠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한무제에게 패한 흉노는 쇠퇴의 길을 걷던 중, 기원전 48년, 후한 광무제의 중국 통일 이후 남과 북으로 분열됐다가 북흉노의 멸망 이후 잠시 자취를 감추는 듯 했다. 그렇다면 흉노는 정말로 사라진 것일까? 그들의 일부는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기도 했고, 또 다른 이들은 오랑캐의 후손이라는 오명을 쓴 채 현대 문물과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울타리 안으로 몸을 감췄다. 그리고 약 420년 전, 한 마을에 모여 사당을 짓고 하루도 빠짐없이 제사를 지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상 흉노의 정신과 문화를 지키려고 애쓰는 흉노의 후예들이 있으니, 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바로 ‘김가장촌’이다.



과거에 대제국을 이룩했던 흉노. 흉노가 이토록 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적이라고 할지라도 항복하고 귀순한 자들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관용과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개방성과 포용성 때문이었다. 지금 남아있는 그들의 후손들이 지키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북방판 똘레랑스가 아닐까.





2부 초원의 늑대, 대륙을 품다 - 선비



현대의 중국인들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살고 싶은 나라' 2위로 뽑힌 당제국. 현존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제외하고, 고대의 국가인 당나라가 중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국제국가로 위상을 떨치며 호한융합의 완성이라는 화려한 꽃을 피운 당제국을 세운 전설적인 황제, 태종 이세민! 그에게는 놀라운 출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으니... 바로 북방 유목민족의 모계 혈통을 가진 선비의 후예라는 것! 또한 혈통 뿐 아니라 당태종 이세민은 정책에 있어서도 북방민족의 것을 그대로 계승했다. 탁발 선비가 세운 북위의 특색을 이은 북궁후원과 방장제가 바로 그것인데, 방장제는 넓은 초원에서 한 명의 목동이 많은 양떼를 몰듯이, 일정한 공간의 방 안에 무리를 나누고 사방에 문을 두고 지키는 형태의 제도이다. 아침에 종을 쳐서 성안의 모든 백성들을 성 밖으로 나가서 활동하게 하고, 저녁에는 북을 쳐서 다시 일정 시간에 안으로 들어오게하는 방식으로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북방 유목제국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특색이다.



또 대부분의 중원 왕조가 도성 중앙에 궁궐을 두고 앞에는 조정을, 뒤에는 시장을 두는 중국 <주례>의 지침을 따른 반면, 당태종 이세민이 재건한 장안성은 도성의 최북단에 궁궐을 두고 바로 뒤에 금원을 배치하는 북방 유목 제국의 특징인 ‘북궁후원’ 의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당나라는 북방 유목민족 정신을 이은 선비의 후예가 세운 북방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선비는 누구일까?



흉노의 뒤를 이어 두 번째 몽골 고원의 지배자로 등극하며 북방제국의 시대를 이어간 북방민족 선비! 아무런 기록도 흔적도 없었던 선비의 역사가 세상에 조금씩 알려진 것은 한 동굴에서 비밀스러운 축문 하나가 발견되면서부터다. 1980년 한 고고학자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알선동 동굴 벽의 축문. 축문의 내용은 놀랍게도 탁발선비의 발상지가 알선동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알선동 지대에 살았던 탁발선비는 서기 1세기 경, 서남쪽의 초원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고 수렵이 아닌 유목과 목축 생활로 전환이 되면서 중원의 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북위의 초대 황제 탁발규는 한족 출신의 인재들을 적극 등용하는 등 적극적인 ‘호한융합’을 주도하며 북위의 기틀을 확립했다.



도무제 탁발규의 호한융합 정책 중 하나였던 불교문화는 이후 북위 예술과 문화의 전성기를 대표했고, 그 중 하나인 운강석굴의 불상은 북위의 유명한 황제 5명을 석가모니로 일치시켜 만든 것으로 종교와 정치, 신권과 왕권이 결탁된 초기 북위의 체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문명태후에 이르러서는 북위의 한화정책이 강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문명태후가 바로 한족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손자 효문제가 이어받아서 더 강력한 한화정책을 펼쳤다. 그 한화정책이 심지어 자신들의 성씨와 언어, 문자까지 버리고 한족의 것을 택하는 등 결국 유목민족의 정체성을 잃고 북위는 점점 쇠퇴한다. 이런 북위가 쇠퇴하는 것을 지켜본 이가 바로 북위의 몰락 후 실권을 잡고 북주 정권의 기틀을 잡은 우문태이다. 우문태 역시 호한융합 정책을 계승하였으나, 흉노의 몰락을 반면교사로 삼아 북방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호한 절충론을 선택하였다. 이런 북주 정권의 호한 절충론은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에 이르게 되고, 당나라는 북방민족의 개방성과 포용성의 장점을 잘 살려 국제적인 국가로 발전하게 됐다. 우문태의 호한 절충론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선비의 본거지인 관중 지역을 중심으로 호족과 한족이 섞인 관롱집단이다. 관롱집단은 우문태 정권의 근간을 이뤘을 뿐 아니라 수나라를 세운 양견 역시 관롱집단 출신이었고, 당고조 이연도 관롱집단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세우게 된다.



호한융합 정책 중 하나였던 불교문화는 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효문제 시절 축조하기 시작한 용문석굴은 당나라 때까지 계속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용문석굴의 대불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하여 당시 풍만한 여인을 미인의 기준으로 여겼던 북방의 미인관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당나라의 대표적인 미인인 양귀비까지 미인관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당제국은 미인관, 정치, 문화, 사회 제도적인 면에서도 북위의 호한융합을 계승하고 있지만 북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호한융합 정책을 완성시켜 나갔기 때문에 국제적인 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방사 최초로 한족과의 융합을 도모했던 선비. 넓은 초원을 자유롭게 누비는 북방 유목민족 특유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여주며 더 넓은 곳을 향하여 갈 그들의 미래에 밑거름이 되어준 것이 아닐까.





3부 정복과 관용의 두 얼굴 - 거란



얼어붙은 황하를 건너 남방의 한족을 정복하고 최초로 한족과 북방민족의 이원적 지배 체제를 구축한 요나라! 거란 요왕조의 태동은, 8개의 부족으로 나누어져있던 부족을 통일하고 스스로를 거란의 황제로 선포한 최고의 리더, 야율아보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요나라의 제 1대 황제 야율아보기는 거란을 부족 연합에서 국가 체제로 바꾸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이원적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혁이라고 볼 수 있는 야율아보기의 통치 제도는, 호한융합 정책을 썼던 선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요나라는 호족과 한족을 구별하는 이원 분리체제를 실시했다. 예를 들어 한족을 관리하는 것은 남면관이었고 유목민을 포함한 호족은 북면관을 두어 분리하여 통치했다. 결국 지배 계층은 거란이었으나, 유목민은 유목민의 법으로 다스리고 한족은 한족의 법으로 다스리는 이원적 구도를 이룬 것이다.



거란이라고 하면 싸움만 잘하는 용맹한 전사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초대 황제인 야율아보기의 능에서 발견된 ‘거란문자’는 북방 유목민에서는 최초로 만든 스스로의 문자이다. 또한 현존하는 중국의 목탑 중 가장 오래된 응현목탑과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탑이라는 독특한 양식의 요쌍탑, 거란의 팔만대장경이 있는 상,하 화엄사는 찬란하게 꽃피운 거란의 불교문화 예술을 보여준다.



또한 고대 유목민족 매장 제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부부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그게 바로 요나라 경종의 손녀 진국 공주와 부마의 합장묘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예술적인 가치가 높아서 진국 공주와 부마묘의 합장묘는 당시에도 애절한 사랑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그 외에도 요나라의 뛰어난 문화 예술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뛰어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거란인들은 모두 사라졌을까? 거란이 멸망한지 수백년이 지난 오늘, 거란의 후예들은 아직도 중원에서 북방 유목민족의 특징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들이 바로 거란의 후예라고 알려진 다고르족이다. 다고르족은 그 옛날 정복 왕조로 위상을 떨친 거란 전사들의 용맹함 뿐 아니라, 선비의 호한융합 정책의 한계를 넘어 호족과 한족의 이원 분리 체제를 통해 제국을 다스렸던 지혜로움, 독창적인 문자 창제와 찬란한 불교와 예술 문화를 꽃피운 거란의 정신을 후대에 기리며 살고 있다.



다고르족은 지금도 거란의 온돌문화인 캉을 유지하고 전통 음식을 먹으며 풍속을 지키려고 하며 살고 있다. 그들이 거란의 풍속을 잃지 않고 지키려고 한 것은 예전에 그들의 조상 거란이 용맹하고 뛰어난 전사였을 뿐 아니라 찬란한 문화를 꽃피이고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넓은 마음을 가진 훌륭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런 조상들의 정신을 지켜가면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거란의 후예, 다고르족이 기억하는 한 북방민족의 정신은 앞으로도 후대에 이어질 것이다.





4부 칸의 제국, 팍스 몽골리카 - 몽골



몽골인의 축제 나담과 칭기스칸!



몽골인들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주목이는 국제적인 행사 나담축제. 위대한 영웅 칭기스칸의 후예들이 그의 훌륭한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계승되어 온 축제로 제2의 칭기스칸을 꿈꾸며 활쏘기, 씨름, 말타기의 3종 경기에서 실력을 겨룬다. 몽골인들의 영웅을 넘어 세계인에게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는 칭기스칸. 그렇다면 과연 그는 누구인가?



칭기스칸은 국적을 불문하고 그는 세계인들에게 위대한 정복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도대체 왜 세계인들은 그에게 주목하는 것일까. 칭기스칸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동유럽까지 정복하며 인류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다. 그의 어릴적 이름은 테무진. 그가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몽골의 작은 마을, 투브 아이막과 빈데르솜에서는 영웅의 탄생을 후대에 기리기 위한 비석과 동상이 세워져있다. 초원의 늑대로 태어나 대제국의 영웅이 되기까지... 그의 빛나는 업적은 지금까지도 바래지 않고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칭기스칸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라시아까지 정복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뛰어난 전술이었다. 그는 적의 마음을 공포에 떨게 하고 적보다 한발 앞서서 공격했다. 또한 그는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정복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누구든 항복하는 자는 너그럽게 받아들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넓은 관용과 포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칭기스칸이 이끄는 몽골의 기병들은 유럽의 큰 말에 비해 아주 작고 볼품없이 생긴 포니라는 말을 타고 먼 길을 달려가서 전투를 했다. 하지만 포니는 비록 작지만 몽골의 추운 바람을 맞으며 험한 초원에서 거친 풀을 먹고 자라 지구력이 강했기 때문에 전투에서 몽골군을 언제나 승리로 이끌었다.



또 일정한 지역마다 장소를 지정해서 사람과 말을 배치하고 다른 지역으로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체계화한 역참제의 도입은 몽골의 세계정복과 세계경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만큼 현명한 통신방법이었다.칭기스칸을 이어 탄생한 또 하나의 영웅, 바로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이다.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의 하드웨어를 구축했다면 쿠빌라이는 거기에 탄탄한 소프트웨어를 채워넣었다고 할 수 있다. 쿠빌라이는 할아버지인 칭기스칸을 이어 몽골제국을 더 크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했다. 세계 각국의 모든 사람들이 원나라로 모여들었고 그 중에는 상인과 유학생 뿐 아니라 동방견문록의 작가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마르코폴로도 있었다. 왕성한 교류는 육지에서 뿐 아니라 해상에서까지 이루어졌다. 쿠빌라이는 국적의 차별이나 종교의 차별을 두지 않았고 자신이 정복한 한족의 종교까지도 존중해주어 북경에 공자의 사당인 공묘를 지어줄만큼 관용을 베풀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정책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자신이 북방 유목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고 으리으리한 대궁궐 안에 초원을 만들고 북방 유목민족의 전통가옥인 게르를 지어 생활하며 몽골인의 정신을 지켜나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던 몽골제국. 위대한 정복자 칭기스칸의 진취적이고 포용적인 정책으로 인한 영토 확장과 쿠빌라이의 개방적인 정책으로 국가를 막론하고 이루어진 활발한 교류는 몽골제국을 더 크고 넓은 대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몽골이라는 대제국에서 소수의 몽골인들이 다수의 이민족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북방민족으로부터 내려왔던 관용과 포용, 그리고 개방정책, 거기에 칭기스칸과 쿠빌라이라는 자신이 북방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두 명의 훌륭한 칸이 있었던 것 때문이 아닐까.





5부 북방의 후예, 아시아의 심장이 되다 - 만주



중국의 수도 북경. 그리고 북경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천안문과 자금성은 청 왕조의 모든 것들이 집결된 곳이다. 다민족국가로서,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슬람세계까지 이어진 중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많은 이민족을, 한 국가 안에 녹여냄으로써 현재의 중화인민궁화국의 원형을 구축한 청 제국. 사실 이 청 제국 역시 북방민족의 후예였다.



청 제국을 세운 만주족의 첫 번째 이름은 바로 ‘여진’이다. 여진은 이름 없는 변경의 유목민족에 불과했었다. 그들을 통일한 것이 금태조 아골타이다. 여진은 요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요나라의 지배가 약화되면서 오대 십국시대로 분열되었고, 여진족들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결국 여진족들은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완안 아골타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해 부족을 통합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금나라를 건국했다. 이후 여진의 금나라가 칭기스칸의 몽골에게 점령당하고 금왕조가 사라지면서 요동 지역의 여진족들도 잠시 와해되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 때 누르하치라는 여진의 뛰어난 리더가 나타났고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모두 통합하여 청 제국의 전신이었던 후금을 세운다. 그러면서 여진이라는 이름은 ‘만주’로 바뀌게 된다. 이 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의 황궁, 바로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심양 고궁이다. 심양 고궁은 청태조 누르하치가 수도를 요양에서 심양으로 천도하면서 만들기 시작해서 제2대 황제인 태종 홍타이지 때 완성되었고 후금에서 만주족이 세운 청 제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누르하치는 여진의 군사제도를 가지고 와서 재정비했다. 바로 팔기제도인데, 팔기 제도는 군사를 여덟 가지 깃발의 색으로 구분하였고 평상시에는 유목이나 목축을 하다가 전시에는 군대로 편성되는 병민일체 제도로 유목민 특유의 조직이었다. 모든 만주족은 8개의 기 중 하나에 소속되었으며 후에는 2대 홍타이지가 이어서 몽골족이나 한족에 의해 편성된 팔기도 창설되었다. 이는 중국 본토를 차지할 때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하였으며 훗날 중국본토 입성 이후에도 청나라 제도의 중심이 되었다. 청 제국의 팔기 제도는 이민족까지 모두 흡수하고, 병민일체 제도의 특징을 가져오면서 소수가 다수를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북방 유목제국의 특징이다. 청나라가 여진에 기반을 두고 있는 북방 유목제국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보여주는 것이다.



뒤를 이어 제 3대 황제인 순치제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통일하고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자금성을 세우고 확고한 틀이 생긴 청나라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라는 훌륭한 세 황제를 통해 전성기를 맞게 된다. 소수의 만주족으로 다수의 한족을 통제하며 야심만만한 대신들, 지방의 세력들, 여러 이민족의 도전에 맞서 제국을 운영해나가야했던 4대 황제 강희제는 삼번(몽골, 티베트, 위구르)의 난‘을 평정함으로써 중국 내지의 통일을 이룩했고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5대 황제 옹정제는 절대 군주권을 확립함으로써 건륭제가 중국 최대 판도를 형성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옹정제는 후계자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황제 생전에 후계자의 이름을 적어 밀봉 후 자금성 건청궁에 보관했다가 사후 개봉하여 공표하는 태자밀건법을 시작했는데, 이 제도는 생전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는 만주족의 전통과 이에 반대인 중국식 황태자제 방식을 결합한 점에서 화이일가 다민족국가로서의 청조를 상징하는 독특한 제위 계승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 강희제로부터 아버지 옹정제가 다져놓은 청나라의 전성기는 손자인 6대 황제 건륭제에 이르러 만주족의 혁신 정신이 최고조에 달하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60년의 재위 기간 중 45년에 걸친 외정(外征)에 나서 마침내 중국 동북부, 중국 내지, 몽골고원, 동투르키스탄, 티베트를 포함한 이슬람 세계를 병합한 거대한 영토를 거느리며 다민족국가인 청조의 영역 확대의 최종 단계를 이룬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이 세 황제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유목민과 한족, 서로에게 유리한 정책을 써주어 둘을 함께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본 제도는 북방민족의 것이었고 지배계층도 북방민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만도 안 되는 만주족이 일억이 넘는 한족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이일가(華夷一家)’의 통일 다민족국가로서,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슬람세계까지 이어진 중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많은 이민족을 한 국가 안에 녹여냄으로써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원형을 구축한 대 청 제국. 북아시아 세계와 동아시아 세계에 독자적인 국제 질서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유럽 세계와 대결하는 일대 세계 제국을 이룩한 청조의 경영 전략은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디지털 노마드로 계승된다. 지역과 국경의 장벽 사라지고 전 세계인이 서로 교류하며 나날이 새로운 것이 생기고 사라지는 현대에서, 자유로움과 창의성, 개방성을 추구했던 북방 유목민족의 정신은 21세기 디지털 혁명을 통해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어 인터넷을 매개로 민족별 장벽이 무너진 현대인들은 전체가 디지털 유목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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