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다피는 없다.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튀니지의 벤 알리Ben Ali와 같은 권력자들도 짐을 꾸려 도망쳐버렸다. 향후 북아프리카에는 민주 정권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 카리브 제도 출신의 흑인 정치가 리처드 무어Richard B. Moore는 ‘개와 노예는 주인이 이름을 지어준다. 오직 자유인만이 스스로 이름을 짓는다’고 했다. 아프리카인들도 이제는 누군가의 간섭 없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정의해야 할 것이다. 피부 색깔을 공통분모로 한 인종적 민족주의의 부활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유럽과 아랍의 간섭 없이 아프리카인 스스로가 평화적이고 긍정적인 정체성을 모색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p.33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을 철폐한 정치인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국제적인 존경을 받는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가다피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가다피는 남아공의 흑백 차별 철폐를 위해 투쟁했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자금을 지원했는가 하면, 1989년에는 만델라에게 가다피 스스로가 제정한 ‘가다피 국제인권상Al-Gaddafi International Prize’을 수여했다. 그의 후원 때문인지 모르지만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은 철폐되었고 만델라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만델라에게 가다피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청했으나, 만델라는 오히려 가다피를 ‘형제 지도자’, ‘남아공 민주주의의 후원자’라 칭하며 친분을 과시했다. (…) 그를 후원한 가다피의 의도는 사실 딴 데 있었다. 가다피는 만델라만 후원한 것이 아니다. 그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아일랜드해방기구IRA,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의 반군도 후원했는데, 이를 통해 미국과 유럽, 그리고 백인 체제를 흔들고자 했던 것이다.---p.34
헤겔은 그의 저서《역사철학강의The Philosophy of History》에서 우선 아프리카를 문화적 특성에 따라 세 지역으로 구분 지었다.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와 나일 강 유역은 유럽과 근동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곳인 반면, 이 두 지역을 제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진정한 아프리카Africa Proper’라고 명명하면서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 헤겔의 의해 아프리카는 유아기의 인류, 고차원적 사고 능력이 없는 흑인들의 땅이자 어두운 밤의 장막에 둘러쳐 있는 대륙으로 묘사된다. (…) 또한 그는 아프리카인에게 종교적으로도 편향된 시각을 투영했다. 고차원적인 기독교는 야만인들에게 적합지 않으며, 오히려 이슬람교가 더 잘 어울릴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흑인의 인간성에 대한 부정은 19세기 노예무역업자와 노예를 필요로 했던 이들에게 양심의 가책 내지는 죄책감의 방파제가 되어주었다. ---pp. 41~42
경제학자들에게 아프리카는 참 당혹스러운 대륙이다. 경제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도 많아서다. 앞에서 살펴본 ‘석유의 저주’는 그 단면일 뿐이고, 또 다른 심각한 모순이 원조와 경제 성장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 1990년대 중반 서방 세계는 원조의 효과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의미 있는 교훈을 얻었다. 원조를 주는 국가, 즉 주체와 행위 자체의 문제점을 인식한 것이다. 그들은 그저 돈과 물자를 주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가 원조의 효과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했고, 원조 받는 국가, 즉 수원국의 실정을 고려치 않는 일방적이고 무성의한 원조에 경각심을 느꼈다. 이러한 원조는 소위 탁상 원조bureaucratic aid 또는 눈먼 원조blind aid이며,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가 원조 기금을 착복하거나 잘못 사용함으로써 원조의 효과를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왔다. ---pp.165~166
흔히 아프리카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허약한 국가, 막강한 지도자weak state, strong leader’라는 말로 표현한다. 대부분 아프리카 정부가 무능해서 국민들의 기본적 복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반면, 지도자만큼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특히 공안 조직인 경찰과 군대는 권력 유지에 필수적인 조직인데, 대개 그 지휘와 운영은 친인척이나 대통령의 측근이 맡는다. 거의 모든 아프리카에서 군과 경찰은 현 집권자의 편이기에, 대규모 시민 봉기와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들에게 정치적 중립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오히려 지도자들의 명을 받아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시민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군이 무고한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고 중립을 지켰기 때문인데, 사하라 이남의 현실은 이와는 무척 대조적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재스민혁명을 기대할 수 없는 것도 에티오피아가 가장 혹독한 경찰국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p.336
현재 아프리카에서의 역학 구도는 많이 달라졌다. 압도적이던 미국과 유럽의 지위를 중국, 인도, 러시아, 브라질 같은 신흥 경제국들이 잠식하고 있다. 그들은 석유와 가스, 그리고 광물 자원의 보고이자, 미래 소비 시장인 아프리카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유전과 광산을 소유한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이제 ‘갑’의 지위에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거래처를 선택하게 되었으며, 전통적 후견 국가였던 서구는 점점 그 우월했던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 소위 신 아프리카 쟁탈전New Scramble for Africa이라 불리는 최근의 이 현상은 자원 선점을 위한 경쟁이라는 점에서 19세기 말 아프리카 쟁탈전과 유사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각축전은 그 스케일과 양태가 다르며, 국제 정치적 파급 효과도 훨씬 크고 복잡하다. (…) 당장의 근심은 중국에 집중되어 있다. 그만큼 지난 10년간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확장 속도는 놀랍고 또 위협적이었다.
---pp.345~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