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11세의 나이로 동갑인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다.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하여 '방지거(方濟各,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집안이 어려워 교비생(校費生)으로 학교를 다녔다.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냈고,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해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다.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 덕에 풀려났다. 1923년 4월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하고 귀국한 이후, 8·15 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고,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지내며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으로 근무했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 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 서울에서 더이상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현재까지도 정지용의 정확한 사망 일자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다만 납북 후 사망했다고만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