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호적 감정이 더욱 짙어진 재판장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작가가 명시적으로 유보하지 않았다고 시나리오를 검토할 권리를 포기했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일단 법적 판단이 필요한 문제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저와 영화사 직원이 처음 전화로 얘기한 것에 관해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것이 명백합니다.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전화로 ‘선생님 덕분에 영화를 잘 만들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면, 그 이전 어느 시점에 그 사람이나 영화사의 다른 사람이 제게 ‘영화를 찍겠습니다’라는 얘기를 했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영화를 찍는다는 얘기도 오가지 않은 처지에서, 느닷없이 ‘덕분에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인사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피고 측 준비서면들 어디에도 그 전화를 하기 전까지 영화사가 제게 연락을 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느닷없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재판장이 말했다.
뜻밖의 대꾸에 그는 입을 벌렸다. 재판장이 저쪽 변호사를 돌아보며 ‘아무개 변호사는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물으리라고 예상했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재판장이 가로막고 나서서 그를 반박한 것이었다.
그의 눈길을 받기 어려웠는지, 재판장이 저쪽 변호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영화 자막에서 원작 표시는 뺄 수 있다고 했지?”
“네. 그건 뺄 수 있습니다,” 저쪽 변호사가 냉큼 대꾸했다.
문득 모욕감이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재판장과 저쪽 변호사 사이의 대화와 보디 랭귀지는 그들이 무척 친한 사이임을 말해주었다. 그들이 그런 사이라는 점은 그에게 반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가 불평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재판장이 법정에서 한쪽 변호사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다른 쪽 변호사에겐 친밀한 몸짓을 보이면서 반말까지 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작 모욕감을 느낀 것은 재판장이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그와 김변호사를 모욕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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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설을 쓰는 데보다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자본주의 체제를 변호하는 데 시간을 많이 쓰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이념적 풍토는 점점 메마르고 있었다. 자유주의에 대해서 반감을 드러내는 시민들은 빠르게 늘어났고, ‘평등주의 이념과 야만적 강제의 동거’가 어느 사이엔가 공식적 질서가 되었고,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적 소수가 되었다. 빠르게 좁아진 자유주의자들의 영역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선 곳이 망명지처럼 느껴졌다. 자유주의를 기본 원리로 삼은 사회에서 자유주의자가 망명객이 된 것이었다.
그를 허탈하게 한 것은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자유주의자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1980년대 말엽까지도, 자유주의는 이 땅의 지식인들 사이에선 ‘더러운 말’이었다. 지식인들 가운데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부른 사람은 드물었다. 1990년대 초엽에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의 압제적 체제가 무너지고 공산주의의 참혹한 실상이 드러나자, 좌파 지식인들은 슬그머니 ‘자유주의’라는 말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전통적 자유주의자들에겐 ‘신자유주의’라는 표지를 붙이고,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주의자들이라고 우겨댔다. 그때까지 자신을 자유주의자로 부른 사람들 모두가 자유주의의 기본적 특질로 받아들인 것은 ‘개인들에 대한 사회적 강제는 되도록 작아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개인들의 판단을 사회 다수파의 판단으로 대치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라 부르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기가 막히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런 현상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어 자신을 달랬다. 1900년경부터 좌파가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음을 이미 반 세기 전에 슘페터는 지적했었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고의 찬사로서, 민간 기업 체계의 적들은 자유주의라는 표지를 가져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도 미국에선, 다른 나라도 아니고 자본주의가 가장 성한 미국에서, 자유주의는 정부의 권한과 시장에 대한 간섭을 늘리라는 주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원래의 자유주의는 보수주의라 불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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