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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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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겨울

[ EPU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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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2월 13일
이용안내 ?
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12.76MB ?
ISBN13 9788950986629
KC인증

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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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코 바로 아래에 놓인 작은 머리통의 냄새를 맡으며 잠드는 것을 좋아했다.
질은 여섯 살, 나는 열 살이었다. 나는 어머니와도 같은 너그러움으로 질을 사랑했다. 그 애를 이끌고,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누나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순수한 사랑이었다.
아무것도 돌려받고자 하지 않는 사랑. 파괴될 수 없는 사랑.
--- p.14

마치 농담 같았다. 웃음소리까지 들려왔다. 진짜 웃음은 아니었다. 내가 웃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죽음이었다고 믿는다. 아니면 운명이었거나. 그도 아니면 나보다 훨씬 거대한 어떤 것, 그날따라 짓궂게 굴고 싶었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었다고. 그 힘이 노인의 얼굴을 한 채 웃기로 결심했던 것이라고.
--- p.31

나는 누군가가, 어른이, 내 손을 잡고 데려가 침대에 눕혀 주길 바랐다. 내 생의 방향을 바꾸어 주길 바랐다. 내일이 올 것이고, 이어서 또 그다음 날이 올 거라고, 그러면 결국 내 삶은 얼굴을 되찾을 거라고, 내게 말해 주길 바랐다. 피와 공포는 옅어질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 p.33

아버지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머리를 들어 올려서는 식탁에, 똑같은 지점에, 깨진 접시 파편이 널린 곳에 여러 번 내리찍었다. 나는 어느 것이 어머니의 피이고, 어느 것이 스테이크의 피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가 없었다.
문득 나는 그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모조리 지워 버릴 테니. 그러면 나의 새로운 미래에서는, 그 모든 게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될 것이었다.
--- p.63

질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 헬무트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헬무트의 발에다가 압정을 찔러 넣고 있었다. 친칠라는 몹시 날카롭고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뭐하는 거야?”
질이 텅 빈 커다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눈에서는 조금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놀이를 중단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질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어서 마치 내가 그 순간을 망쳐 버린 것만 같았다.
--- p.92

모니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구나.”
“할머니는 요정이잖아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달려야 했다. 그저 달려야만 했다. 그녀의 말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다. “하지만……. 이건 그냥 놀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 아니었니?”
--- p.101

나는 자연과 그것의 온전한 무심함을 사랑했다.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연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생존과 번식에 관한 세밀한 계획을 수행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망가뜨려도, 새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서 위안을 느꼈다. 새들은 지저귀고 나무들은 삐걱거렸으며 바람은 밤나무 잎 사이를 오가며 쉼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관람객이었다. 그리고 작품은 멈추지 않고 공연되었다. 계절에 따라 배경이 바뀌었지만 매년 여름이 왔고, 그 빛과 향기와 길가 가시덤불 위로 솟아나는 나무딸기는 언제나 변함없었다.
--- p.117

“나 임신했어, 여자아이야.”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어떤 것이 내 심장을 눈송이로 바꾸었다. 그녀가 그것을 흔들자 반짝거리는 수천 개의 입자가 내 안에서 움직였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 아기는 벌써 어머니로부터 깊은 사랑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 사랑은 내가 존재했던 지난 12년 동안 내 부모님으로부터 그러모아야 했던 것보다 커 보였다. 하지만 보잘것없다는, 괴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떤 위로가, 안전함이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가 깃털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p.120

질은 낯선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어딘가에, 그 아이의 내면에, 내 동생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가끔은 그 애의 얼굴에서 희미한 빛과 어렴풋한 미소가, 눈에서 반짝이는 빛이 덧없이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애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서 우리 삶의 흐름을 바꾸는 일에 매달렸다.
--- p.131

바로 그때, 그것이 깨어났다. 내 배의 구멍 속에서. 장기들이 있는 정도의 깊이가 아니었다. 훨씬 깊숙한 곳, 모든 것을 넘어선 어떤 곳에서부터였다. 그곳에서 나보다 훨씬 거대한 어떤 생명체가 솟아 나왔다. 내 배 속에서. 챔피언을 통해 자라났던 그런 따뜻하고 부드러운 짐승이 아니었다. 이 짐승은 끔찍했다. 비열한 얼굴로 다른 창조물들을, 자기 아이들을 토해 냈다. 그것은 내 아버지를 집어 삼키고 싶어 했다. 나를 아프게 하려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싶어 했다. 그 짐승은 내가 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짐승이 어둠을 가르며 길게 포효했다.
이제 끝났다.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포식자도 아니었다. 나는 나였고, 파괴될 수 없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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