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넷째 삼촌을 ‘짱구’ 또는 ‘짱구박사’라고 불렀다.
삼촌은 늘 진지하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삼촌이 말하면 왠지 그럴싸하게 들렸다.
웃음기 싹 뺀 어투로 가르치듯 대화를 이끄는 삼촌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늘 그 마무리는 시시하고 어처구니없는 미신이나 농담 따위가 대부분이라 삼촌의 이야기 끝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와 동생, 가끔 막냇삼촌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삼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비록 엉터리일지라도 내가 묻는 말에 한 번 도 “모른다”라고 이야기를 끝내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삼촌이 나만 보면 늘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너, 친엄마 안 찾아? 네 진짜 엄마 시장에서 새우젓 장사해. 나중에 꼭 찾아가. 가만있어보자. 다리 밑에서 울고 있는 널 데려온 지가 어언…….”
짓궂은 짱구박사의 농담에 한두 번은 눈을 흘기며 반항하기도 했는데 너무 장기간, 그것도 한 번도 웃지 않고 진지하게,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통에 가끔씩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삼촌, 그만해요. 왜 자꾸 그래? 애 울겠어.” 엄마는 내 속상한 마음을 알고 종종 거들어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삼촌은 예의 그 진지한 모습으로 네모난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형수님, 언제까지 숨기실 거예요. 지은이도 이제 알 나이가 됐어요.”
가끔 짱구박사는 사기꾼 막냇삼촌과 내가 듣는 곳에서 보란 듯이 나의 친엄마 이야기를 하곤 했다. 쟤는 아직도 모르냐, 네가 한번 데리고 가서 보여줘라, 형이 가라, 네가 가라, 불쌍하다 등등. 그리고 엄마에게 혼이나 울고 있는 내게 다가와 지금이 기회라고, 친엄마를 찾아가라고, 저 엄마는 네 친엄마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널 혼내는 거라고 위로가 되지 않는 말로 날 달래주곤 했다.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새우젓을 팔고 있는 아줌마를 유심히 살펴봤다.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좀 다른지. 그렇게 몇 번 시장에 따라가 아줌마를 관찰하던 어느 날, 엄마 손을 놓고 새우젓 장사 아주머니 앞에 서서 펑펑 울며 물었다. “아줌마가 진짜 우리 친엄마예요? 나 진짜 아줌마 딸이에요?”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새우젓 아줌마와 우는 나를 달래는 엄마 사이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느 쪽이 내 친엄마인 것인가. 당황한 사람과 황당한 사람 중에서 내 진짜 엄마를 찾아내야 했다.
내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엄마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새우젓 장사 아줌마가 내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돌아온 날, 나는 당당하게 짱구박사에게 이야기했다.
“삼촌, 새우젓 장사 아줌마 우리 엄마 아니래. 오늘 내가 물어보고 왔어!”
삼촌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받아쳤다.
“아, 내가 얘기 안 했나? 너희 친엄마 공덕 시장으로 이사 갔대.”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 #진실을 알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린 시간
--- p.16~18
소독차 따라 달리기의 묘미 중 하나는 연기에 가려 바로 옆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뛰다 보면 출발할 때 옆에 있었던 상우나 미영이가 아닐 수도 있었다. 가끔씩 손으로 연기를 저어가며 주위 친구들 얼굴을 확인하고 생각지도 못한 친구가 옆에 있으면 그게 또 그렇게 웃기고 재미있어 배가 아프게 웃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차 꽁무니에 매달린 친구들의 얼굴이 죄다 낯설었다.
차에서 뛰어내려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뒤쪽으로 물러났지만 출발할 때 함께 뛰었던 미영이도, 상우도, 지은이, 민 우, 지훈이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연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소독차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뿌연 연기가 가라앉자 희미했던 사물들이 점차 또렷해지며 제 모습을 찾아갔다.
낯선 골목, 난생처음 보는 길이었다. 우리 동네 어디서 든 보이던 언덕길 끝 교회도, 삼거리 우물도 보이지 않고 조금만 킁킁거리면 느껴지던 라일락 꽃향기도 나질 않았다. 익숙한 사물들도 낯선 동네에서 마주하니 모두 커다랗게 보였다. 술래집이 되어주던 집 앞 전봇대, 돈까스를 할 때 유용했던 동그란 하수구 맨홀, 골목길 사이사이를 메꾼 듯 네모반듯하게 놓인 시멘트 쓰레기통들도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집을 찾아 한참을 걷다가 내가 멈추어 선 곳은 땅콩을 파는 리어카 아저씨 곁이었다. 가끔씩 아빠가 퇴근길에 사 오시던 방금 볶아낸 따끈한 땅콩. 나는 그것을 자주 ‘콩땅’이 라 바꿔 불렀는데 연탄불에 땅콩을 볶는 고소한 냄새에 끌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추어 선 것이었다. 어쩌면 아빠 가 땅콩을 사오는 곳이 여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마침 버스 정류장도 앞에 있어 여기서 기다리면 퇴근하시는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리는 모든 남자 어른들이 아빠로 보였다. 막냇삼촌이 어디선가 “지은아” 부르며 달려올 것만 같았다. 유난히 나를 예뻐하던 둘째 고모도 나를 찾아내 와락 껴안아 줄 것만 같았다. 늘 너희 진짜 엄마는 시장에서 새우젓을 판다고 놀리던 넷째 삼촌 짱구박사마저 보고 싶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터져나오는 눈물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얼마나 소독차에 가까이 붙어서 뛰었는지 얼굴에서는 눈물과 함께 하얀 가루가 툭툭 떨어져 내렸다.
아저씨의 땅콩은 한 봉지도 팔리지 않았고,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저씨는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내게 다가와 작은 플라스틱 의자를 내어주고 땅콩을 한 줌 쥐어주셨다. 너무 늦게까지 날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경찰서에 데려다주신다는 말과 함께.
달빛이 환하게 비추던 밤, 땅콩 리어카 옆에서 허연 눈물 자국이 번진 채 아저씨가 사주신 보름달 빵과 우유를 먹고 있을 때 저 멀리 쌀집 아저씨네 배달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다.’
터져 나오는 반가움의 눈물과 기쁨의 탄성을 보름달 빵과 우유로 간신히 참아 넘기고 아빠가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아빠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아빠 냄새.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무척이나 길고 길었던 그 날 하루가 머릿속에서 천천히 맴돌았다.
아빠는 땅콩을 여러 봉지 사시며 아저씨에게 몇 번이고 고개 숙여 인사하셨다. 그리고 나를 번쩍 들어 안아 쌀 포대가 차곡차곡 접혀 있는, 넓은 검은색 고무줄이 칭칭 감겨 있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혀주셨다.
“아빠, 아빠가 콩땅 사 오는 데가 저기야?”
“아니.”
아빠는 나를 찾은 만리동 고개를 지나 기찻길이 있던 마포 굴레방 다리까지 달렸다. 그제야 눈에 익은 친근한 풍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공덕 시장, 코끼리 아파트, 적십자 병원, 가든 호텔, 중앙 교회, 인쇄소……. 집에 가야 하는 길을 지나쳐서 아빠는 계속 달렸다. 그리고 경보 극장 앞에 멈춰 섰다.
“여기야.”
“뭐가?”
“아빠가 땅콩 사 오는 곳.”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빠는 잔소리나 꾸중 대신 자전거에 나를 매단 채 골목 이곳저곳을 탐험하듯 돌아다니셨다. 이제는 길을 잃어버려도 잘 찾아오란 뜻이었을까? 나는 아빠의 등에 딱 붙어서 동네 풍경을, 골목 구석구석을 눈에 차곡차곡 담았다.
#마성의 하얀 연기 #지구 끝까지 따라가리 #그러다 미아 될 뻔 #그러나 #어디선가 보이면 #또 달리게 되는 #숙명의 하얀 연기
--- p.8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