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역적의 아들, 정조』를 통해 비극 3대의 이야기를 시작하였고, 본 책인 『버림받은 왕자, 사도』를 통해 비극 3대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비극 3대의 핵심 인물이자 애증으로 얽히고설켜 있는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 두 사람의 관계를 저만의 시각으로 정리하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생후 1년 만에 세자로 책봉되어 조선 최연소 세자가 된 사도세자가 왜 결국 ‘뒤주 속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또한 아버지는 왜 단 하나뿐인 귀한 아들을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비극 3대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말」중에서
사실 영조는 어릴 때부터 왕의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복형 경종이 왕세자 자리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죠. 또한 왕세제로 책봉되기 전 10여 년 동안 어머니인 무수리 최씨와 궐 밖에서 살면서 보통의 아이들처럼 일반 백성들과 뛰어놀며 지냈습니다. 임금 영조는 굉장히 검소했다고 합니다. 조선 최고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몸에 밴 검소함을 계속 유지했고 좋은 비단옷을 입는 것을 꺼렸습니다. 영조는 백성에 대한 사랑이 깊었는데, 이는 본인의 사가 생활(궁궐 밖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종종 이야기했습니다.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몸소 체험한 것이죠.
그래서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에 따라 나라는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를 이미 몸으로 깨달았던 임금이 바로 영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록에는 영조의 사가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실록은 임금의 행적을 기록한 자료인데, 영조가 20대중후반에 왕세제가 되었기 때문에 사가 생활에 대한 기록은 소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영조가 재위 기간에 “내가 사저에 있었을 때에……”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그 당시의 삶을 ‘추정’할 수 있고, 특히 그의 검소한 삶이 사가 생활과 관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장면 2. 참 좋은 시절」중에서
영조는 집권할 때 세 가지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천민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은 유교 사회입니다. 또한 정실이 낳은 맏아들인 적장자(嫡長子)를 매우 중시하던 사회였죠. 제17대 임금인 효종과 효종비가 죽었을 때, 왕실 가족 및 신하들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효종이 차남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전의 소생임에도 차남이라는 이유로 상복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날 정도였죠. 그런데 영조는 후궁도 심지어 궁녀도 아닌, 궁녀의 옷을 빨아주고 궐의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무수리, 즉 천민의 소생입니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서 유일하게 천민 출신의 왕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콤플렉스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한계를 안고 있었고, 어렸을 때는 왕이 될 줄 모르고 서민들과 뛰어놀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 콤플렉스는 자신의 배다른 형인 경종을 죽이고 왕이 됐다는 굴레를 뒤집어쓴 것입니다.
경종이 몸이 아프니 영조가 형님의 쾌차를 바라며 게장을 올리고 이어서 생감도 올립니다. 그런데 이 게장이 속이 안 좋은 사람에게는 다소 비리게 느껴질 수 있죠. 그래서 경종이 비린 게장을 먹고 복통을 앓고 설사를 심하게 했는데, 속이 아주 불편한 상태에서 게장과는 상극인 감을 먹었으니 경종의 속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된 겁니다. 경종이 며칠 동안 기력을 되찾지 못하자 영조가 이번에는 인삼차를 올릴것을 주장해 경종은 인삼차를 마십니다. 하지만 끝내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인삼차를 마신 다음 날 경종은 승하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것일까요? 독살을 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다만 영조가 어쨌든 형을 죽이고 왕이 됐다는 굴레를 뒤집어쓴 것은 명백합니다. 당시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영조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테고, 사실이 아니라면 매우 억울한 일이지만요. 이복형 경종에 대한 독살설은 영조에게 큰 트라우마였습니다. 선왕을 독살했다는 것은 역모를 통해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인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조 연간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는데, 경종 독살설에 의구심을 가진 강경파 소론에 의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즉위 초반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 지방을 뒤흔든 강력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면서도 강경파 소론 세력은 멀리할 정도였습니다.
세 번째 콤플렉스는 영조 자신이 노론의 지지로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천민의 아들이 왕이 된 것도 콤플렉스인데, 자신의 힘이 아닌 신하들의 지지로 왕이 되었으니 얼마나 입지가 약했겠습니까? 그래서 영조는 붕당에 관계없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고자 탕평책을 시행하죠.
---「장면 3. 천민, 왕이 된 남자」중에서
아버지 영조의 지독한 관심과 꾸중 속에서 결국 세자 이선은 정신병을 얻고 미쳐버립니다. 바로 의대증(衣帶症)이라는 병에 걸리는데, 의대증은 옷 입는 것과 벗는 것을 잘 못하는 병을 말합니다. 옷을 입는 데 하루가 걸리고 벗는 데 이틀이 걸립니다. 보통 왕실 사람들은 옷을 혼자 입지 않습니다. 옷 입는 것을 시중드는 궁녀가 따로 있죠. 그러니까 세자는 팔만 벌리고 서 있으면 옆에서 입혀주었습니다. 그런데 궁녀들은 세자에게 옷 입히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습니다. 옷을 입히다 옷이 세자의 살결에 닿으면 발작이 일어나서 칼을 꺼내 옷 입히는 궁녀를 무참히 죽였기 때문이죠. 옆에 있던 내관들도 이유 없이 목을 쳐버리고요. 세자는 왜 옷 입는 게 두려웠을까요? 옷을 입는 순간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그 두려움 때문에 세자는 옷을 못 입고 미쳐버린 겁니다. 그러면서 애꿎은 궁녀들, 내시들만 무참히 죽이는 거죠.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러한 세자의 광증은 아버지의 차가운 멸시 때문이었습니다. 영조는 누구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나면 불길함을 떨치기 위해 이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자를 참하였습니다”라는 불경한 이야기를 들으면 귀를 씻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행동을 아들 이선에게도 드러내 보였다는 겁니다. 즉 불경함을 떨치기 위한 행동을 자식을 향해 했던 것이죠. 『한중록』을 살펴보면, 세자가 아버지를 찾아갔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딱 한마디입니다. “밥 먹었느냐?” “예.” 그러고 나면 영조가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씻은 물은 아들이 사는 쪽으로 버렸다고 하니, 세자는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겠죠.
---「장면 8. 살인의 추억」중에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우리의 뿌리를 공부하는 일이기도 하고, 물론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선조들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깨닫고 배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과오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의 3대를 잇는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배워야 할까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많이들 하는데, SNS는 바로 소통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나와 타인의 생각과 일상을 서로 나누는 것이죠. SNS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그만큼 인간은 타인과의 소통을 원하고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소통이 이루어져야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 대화가 단절되면 어떻게 될까요? 천륜이라고 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처럼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200년이 훨씬 넘은 지금 이 시점에 우리가 다시 영조, 사도세자, 정조, 이 ‘비극 3대’의 일을 되짚어보는 것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서로 소통하고 사랑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불통은 역적을 낳고 폭군을 낳습니다.
소통은 충신을 낳고 성군을 낳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장면 10. 대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