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흔이 되어서도 내 자신이 이럴 줄은 몰랐다. 젊은 날의 나는 마흔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고상해질 줄 알았다. 마흔이 되기만 하면 어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저절로 인생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관대해지고, 무엇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마흔을 먹고 나서도 나는 그때처럼 여전히 싱거운 농담을 즐기고, 노는 것을 좋아하며, 무시당하면 발끈하는 옛 성품 그대로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이상과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서 내가 내린 처방은, 내 자신이 지혜로워졌다고 느끼기에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지혜를 정의하는 것이었다. "지혜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 pp.6~7
프레임은 한마디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다.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향한 마인드 셋, 세상에 대한 은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프레임의 범주에 포함되는 말이다. 마음을 비춰보는 창으로서의 프레임은 특정한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이끄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의 역할도 한다.
--- p.15
최종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현재 다이어트에 신경 쓰고 있는 여대생들이, 그렇지 않은 여대생보다 TV의 식품 광고가 더 늘었다고 보고했다. 이들이 서로 다른 TV 프로그램을 봤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다이어트를 하는 여대생들도 내시경 준비를 하던 때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음식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5
아버지와 아들이 야구 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의 시동이 기차선로 위에서 갑자기 멈춰 버렸다. 멀리서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아버지는 시동을 걸려고 황급히 자동차 키를 돌려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기차는 차를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아들은 크게 다쳐 응급실로 옮겨졌다. 수술을 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외과 의사가 차트를 보도니 "난 이 응급 환자의 수술을 할 수가 없어. 얘는 내 아들이야!"라며 절규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버지는 아들과 사고를 당한 뒤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던가? 혹시 의사가 친아버지고, 야구장에 같이 간 아버지는 양아버지였을까?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제 의사가 아들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읽어보라.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 p.32
저자를 비롯하여 당시 대학생들은 방학만 돌아오면 초등학교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의욕과 희망에 넘쳐 《Vocabulary 22000》을 완독하기 위해 전의를 불태우곤 했는데, 거의 예외 없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갔다. 우선 《Vocabulary 22000》을 사면 맨 먼저 책의 페이지 수를 센다. 그리고 방학 일수로 나눈다. 그러면 하루에 공부해야 할 페이지 수가 나온다. 마음속에서 회심의 미소가 떠오른다. "하루에 2~3페이지, 그 까짓 것…."
그런데 웬걸, 시간은 훌쩍 건너뛰어 방학한 지 일주일이 지나게 된다. 그래도 아직은 여유가 있다. 일주일이 지난 시점부터 또다시 페이지 수를 세고, 남은 일수로 나누고, 여전히 몇 장 안 되는 하루 분량에 안도한다. 며칠 그렇게 실천하지만 점점 계획했던 분량에서 멀어지고, 어느새 시간은 흘러 방학은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다음 방학이 돌아오면 '이번만은 꼭 해내고 말 거야.'라며 다시 도전한다. 이 모든 상황이 의지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미래에 대한 우리의 계획이 현재의 의지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 pp.118~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