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독한 술의 세계를 여행하려는, 혹은 막 그런 여행길의 초입에 들어간 당신을 위한 책입니다. 술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고요? 괜찮습니다. 천천히 읽으면서 따라오면 됩니다. 최대한 쉽게 쓰려고 노력한 책이니까요. 당신이 술에 대해 나름대로 전문가라면 우리 대화해 봅시다. 저는 이 책에서 최대한 저의 ‘주관적인 판단’을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술의 역사라거나 유래 같은 객관적인 사실들은 최대한 검증된 이야기만을 담으려고 노력했지만 ‘이 술의 향미는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라거나 ‘이 술은 어떻게 마셔야 맛있는가?’ 혹은 ‘이 칵테일은 어떻게 마셔야 맛있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최대한 제 생각을 강하게 드러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들어가며」중에서
이제 잔을 챙길 차례다. 주방에 가서 잔을 하나 들고 오자. 오는 김에 물도 한 잔 챙기자. 소위 ‘샷잔’ 혹은 ‘양주잔’이라고 불리는 작고 길쭉한 잔을 가져온 당신, 되도록이면 다른 잔을 가져오도록 하자. 물론 ‘샷잔’이 완전히 잘못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따랐을 때 술의 표면적이 작은 그 잔은 술의 향을 충분히 살려 주지도 않고, 향을 잘 모아 주지도 않는다. 향과 맛을 더 강렬하게 즐기고 싶다면 잔을 바꿔 오고, 그냥 독한 술을 한 잔 시원하게 넘기고 싶다면 그냥 그 잔을 쓰자. 시음할 때 가장 적합한 형태의 잔은 와인잔과 같은 주둥이가 좁고 술이 담기는 부분이 넓은 잔이다.
술을 섞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독한 술을 편하게 마시기 위해, 개성이 강한 술의 특징을 다채롭게 즐기기 위해, 아니면 존재하지 않던 제3의 맛을 만들기 위해. 어떤 방향성과 고민을 하든 간에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하다. 다른 방식으로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위스키 스트레이트는 너무 쓰고 독한 술일 수 있다. 전체적으로 편한 맛과 청량감을 주기 위해 탄산수를 부으면 위스키 하이볼이라는 훌륭한 칵테일이 완성된다. 무거운 단맛이 나는 다른 술인 드람뷔(꿀로 만든 술이다)나 아마레또(살구씨로 만든 술이다)를 섞으면 러스티 네일, 갓파더라는 훌륭한 고전 칵테일이 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쉐이크
쉐이커에 여러 재료를 넣고, 쉐이커의 3/4 정도로 얼음을 채운 후, 흔든다. 계란, 시럽, 우유, 크림 등 ‘잘 섞이지 않는 재료’를 넣은 칵테일을 만들 때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다. 재료 특유의 향이 죽고, 얼음이 많이 녹으며, 잘 섞이고, 액체에 공기가 많이 들어가 부드러워진다. 이렇게 말하면 스터에 비해 ‘급이 떨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렇지 않다. 애초에 재료 특유의 향을 즐기고 싶으면 굳이 뭘 섞을 필요가 없다. 드람뷔 같은 무거운 리큐르가 들어가는 칵테일을 쉐이크로 만드는 경우, 평소 무거운 단맛에 가려져 느끼기 어려운 특유의 허브 향을 느낄 수도 있다. 블렌더나 믹서기에 넣고 동력을 이용해 얼음과 재료를 함께 섞으며 갈아 버리면 ‘블렌드’라는 기법이 된다.
칵테일 레시피에서는 두 가지를 고려한 레시피를 소개했다. 첫째로, 소개한 브랜드의 술을 사용할 때 어울리는 방식의 레시피를 소개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필자는 로즈 사의 라임 코디얼이 아닌 생 라임을 쓰는 날카로운 스타일의 탱커레이 No. 10 - 김렛을 소개했는데, 탱커레이 No. 10의 화려한 시트러스 뉘앙스는 날카로운 김렛과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물론 탱커레이 No. 10으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칵테일은 김렛이 아닐 것이며, 김렛을 만들기 위한 최고의 진도 탱커레이 No. 10이 아닐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집에서 편하게 만들 수 있는 방식’을 고려했다. 하여 당신이 다른 레시피북에서 본 레시피와 조금 다른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칵테일 레시피란 그런 것이다. 하나의 이름을 가진 칵테일 레시피는 다양하며, 시대를 지나오며 공식 레시피 자체가 바뀐 레시피도 많다.
모든 진에서는 주니퍼베리의 향이 나고, 이어서 다양한 허브에서 나오는 향이 뒤따른다. 봄베이 사파이어는 달콤한 허브 향이 주를 이루고, 텡커레이는 감귤의 쏘는 듯한 향이 강렬하며, 헨드릭스는 수박과 오이, 장미의 향이 어우러진다. 많은 사람들이 보드카를 소주의 대체품으로 생각하지만, 필자는 런던 드라이 진이야말로 소주의 가장 훌륭한 대체품이라고 생각한다. 특유의 씁쓸하고 드라이한 맛은 그냥 독주처럼 쭉쭉 마시기에도 좋으며 대부분의 음식들과 잘 어울린다. 물론 특유의 송진 향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은 마시기 버겁겠지만, 소주를 못 먹는 사람들도 충분히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진 정도면 충분히 대중적인 소주의 대체품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마르티네스는) 마티니의 조상뻘 되는 ‘진과 베르무트를 섞는’ 고전적인 칵테일이며, 진 앤 잇이라는 별명으로도 자주 불린다. 고전이라는 이름에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만들어 보도록 하자. 진이나 베르무트나 너무 많다. 기본적인 레시피는 진과 스위트 베르무트를 사용하는 것이나, 여기에 마라스키노 체리 리큐르나 큐라소, 혹은 비터를 섞어도 좋다. 소량의 드라이 베르무트를 추가로 사용하는 레시피도 유명하다.
보드카의 고향인 동유럽과 러시아의 전통적인 보드카 음용 방법은 상온의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이다. 하지만 저 추운 나라의 상온과 한국의 상온은 많이 다르기에, 한국에서 보드카를 ‘제대로’ 마시고 싶다면 상온보다는 차게 해서 먹는 쪽이 좋다. 위스키와 브랜디 같은 향이 강렬한 증류주는 상온 내지는 데워서 마시는 쪽이 향 전체를 느끼는 데 좋고(물론 온더락은 그 나름의 맛이 있지만), 보드카나 소주같이 ‘독한 술이지만 편하고 시원하게’ 마실 술은 차갑게 마시는 쪽이 잘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보드카 칵테일의 맛의 섬세함은 진 칵테일에 비해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하지만, 범용성과 편안함은 진 칵테일에 뒤지지 않는다. 순수한 알코올 맛이기에, 무엇과 섞어도 예상치 못한 기이한 맛이나 애매한 느낌이 나지 않는다. ‘이 칵테일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도수를 조금 올리고 싶어’ 같은 상황에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보드카이며, 훌륭한 고전 칵테일의 다양하고 편안한 변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보드카다.
이럴 때 좋을 한 잔(블랙 러시안)
진 토닉과 함께 국민 칵테일이 아닐까 싶다. 독하고 단 게 당기는 날이라면 언제 어떻게 만들어도 무방하다. 커피와 단맛은 알코올 향을 가장 잘 가려 주는 재료 중 하나일 것이기에, 뭔가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벌컥벌컥 마시기 좋다. 물론 그렇게 마셨다가는 이튿날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제법 Tip(블랙 러시안)
좀 더 ‘커피 맛’을 더하고 싶다면 일리큐어 커피 리큐르를 사용하거나, 커피를 사용해 보자. 보드카 대신 커피 맛, 단맛을 잘 받는 아이리시 위스키를 사용해 봐도 좋다. 의외로 과일들과의 조합도 좋으니 기호에 따라 과일주스나 과일 시럽을 써 보는 것도 재미있다. 셰이크를 해서 공기의 질감을 높이고 얼음을 더 녹게 한다면 안 그래도 알코올 향이 약한 친구가 좀 더 부드러워진다. 그렇다고 알코올의 총량이 날아가는 것은 아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