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후, 상대에 관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그건 차라리 불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누군가와 헤어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완전히 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를. 적어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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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요법이란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게 아닙니다. 실제 경험 가능한 것이며 여러분의 육체를 통해서 확인이 가능한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로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생 요법은 일종의 정신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최면과 전생에 관한 선입견과 고정 관념을 떨치시라는 겁니다.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최면에 걸리지 않거니와 수십 번 수백 번 겪어온 전생을 체험해볼 수 없다는 것이죠.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는 전의식이라는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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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끄고 커튼을 젖힌 방으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고여들고 있다. 그녀는 책상 위에 까만 천을 덮고 그 위에 완전한 구의 형태를 가진 직경 10센티미터의 투명한 수정구를 천 위에 올려놓고 있다. 마술사처럼, 혹은 깊은 바닷속의 마녀처럼. 그녀는 수정구를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서 양손으로 감싸쥐고 있다. 긴 머리채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그녀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른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수정구가 환하게 빛난다.
그녀가 돌연 눈을 뜬다. 나는 벽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인다. 그녀가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은 채 수정구를 응시하고 있다. 이제 얼마 후면 의식의 문이 열리며 그녀가 마음속으로 바라던 영상들이 수정구 안에서 나타날지도 모른다.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수정구 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구름 현상'이다. 그것은 원하는 영상이 수정구에 나타나리라는 최초의 조짐이다. 신기가 들린 듯 수정구를 감싸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수정구의 빛깔이 점점 더 뿌옇게 변하고있다. 하현으로 일그러진 달이 창문을 지나고 있다. ……한숨을 토해내듯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몸을 훌쩍 돌린다. 그녀의 이마에 식음땀이 배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노트를 한 장 찢어 무어라고 휘갈려 쓴다. 그리고 종이를 뒤집어 수정구 옆에 놓는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뜨곤 수정구를 응시한다.
전생 퇴행이라는 신비주의적 주레를 다룬다는 것은 자칫하면 결정론에 빠질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주인공을 내세워 삶의 순간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사람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감각적으로 드러내준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구체적 관계의 제시를 통해서 느끼게 하는 작가의 능력을 소설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 문학평론가 김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