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애국지사였던 할아버지로부터 글쓰기 교육을 받으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대로 천주교 순교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성심여자중고등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수녀 교육에 반발하던 그녀는 시와 수필을 계속 썼고 〈학원〉이라는 잡지에 글을 실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학창시절 소설을 전공했다. 현대문학사 추천작가이던 연세대 박영준 교수의 제자로 소설작법을 개인교습 받기도 했다. 스물다섯 살에 결혼을 한 그녀는 철학을 전공한 남편의 반대로 글쓰기를 중단했다.
그런 그녀가 30년 만에 다시 글을 쓰고 출판을 한 동기는 남달랐다. 숨겨진 남편의 25년 된 여자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그녀는 인터넷 사이트에 자신의 상황과 심정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청승스럽지 않았으며 반전의 통쾌한 재치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독자들은 그녀의 반전과 재치에 울고 웃었다. 지은 책으로는 『시앗 : 남편의 첩』 1ㆍ2권이 있다.
강인수의 집안은 대대로 부인을 둘 두었다. 할아버지가 그러했고 아버지도 그러했다. 강인수에게는 배다른 사촌과 배다른 형제가 있었다. 시대가 그러했으며 능력 있는 남자는 부인을 둘 둔다는 말이 서영은 용납되지 않았다. 명절 차례 상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작은 할머니 밥그릇이 놓였고 아버지와 어머니, 작은 어머니 밥그릇이 놓였다. 남자 한 명에 여자가 둘씩이다. 여섯 분의 어른이 한꺼번에 차례 상을 받으시는 장면은 다른 집안에는 없는 장면이었다. 친형제와 배다른 사촌과 배다른 형제, 조카들까지 합치면 사십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런 식의 차례 상은 오래 지속되었다. 배다른 사촌 시동생이 세상을 뜬 후에 명절 차례 상은 분리되었다. 작은어머니들이 똑같은 대우는 받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식을 낳아 주었으면 다 같은 부인으로서 똑같이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조금도 차이를 두지 말고……. 이 점이 이상했다. --- p.28, 〈그 남자①〉 중에서
인수는 두 여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나날이 뻔뻔스러워졌다. 두 아파트 열쇠를 공공연히 자동차 열쇠에 매달고 다녔다. “이건 무슨 열쇠예요?” “아, 그거? 지연이 아파트 열쇠야.” 때론 거짓말도 필요하다던 인수는 이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나 지연이랑 여행 다녀올게.” 여행 가방 찾는 걸 도와주지 않는 서영에게 인수는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당신 이혼 당하고 싶어?” 인수는 그렇게 말했다. “걔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씹이 좋다! 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서영의 입을 닫게 하는 방법으로 인수는 섹스를 이야기했다. --- p.71, 〈그들〉 중에서
『시앗』의 출판 이후 모든 시집 식구들이 서영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서영은 그런 시집 식구들을 보면서 더 이상은 그 집안에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오지 않는 동서들을 외면 한 채 혼자서 명절 준비와 제사 준비를 해 온 삼 년 동안 서영은 날마다 이혼을 꿈꾸었다. 시앗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아직도 강인수는 서영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관념의 차이였다. 시대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강인수는 ‘그것’을 남자의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여자의 숫자는 남자의 능력이라는 것이었다. 시대를 초월한 능력이라고 말했다. 애초부터 강인수에게는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강인수에게는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서영에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능력대로 사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건 남자의 능력이야!” 아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는 인수를 보며 서영은 아연실색했다. 그것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나폴레옹도 여자가 여럿이었고 왕건이나 세종대왕도 여자가 많았어. 독립투사 치고 조강지처랑 살았던 사람이 있는 줄 아냐?” “저도 그렇게 살라고요? 전 그러면 집사람에게 쫓겨나요.” --- p.180, 〈시앗〉 중에서
자식도 손녀도 남편도 다 버리고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잠적하고 싶었다. 세상과의 연을 끊고 당분간 숨고 싶었다. 너의 선택만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나의 선택도 잘못된 것임을 나 스스로 인정해야만 했다. 서영은 최선을 다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 머무르지 말기로 했다. 민우가 결혼하던 날 즉시 끝내고 싶었다. 손녀의 출생으로 미루어졌지만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제 끝내자.’ 늙어 가는 남자에 대한 연민도 사실은 사치였다.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며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좀먹는 일이었다. 자신을 기만하는 일을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살아야만 했다. 사람답게 살아야만 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생이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자. 그곳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행복해지고 싶다.’ --- p.267, 〈삭제〉 중에서
서영은 준혁이 내민 팔베개에 머리를 묻고 잠이 들었다. 잠을 자다가 준혁의 입술이 가만히 와 닿는 것을 서영은 느꼈다. 준혁의 눈물이 서영의 얼굴에 떨어졌다. “사랑해. 너를 놓을 순 없어. 넌 내 운명이라는 말 기억하지?” 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쳐서 우리 사랑을 깨고 싶지가 않은 거야. 결혼과 사랑은 너무 거리가 멀어. 결혼과 함께 사랑은 산산조각이 나지.” “강인수 그 사람이 너무 밉다. 당신을 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가서 기다릴게. 생각해보고 나한테로 올 수도 있지? 결혼이 당신이 생각하듯이 다 그런 건 아니야.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어.” “내게 결혼은 서로의 등을 보는 거였어. 난 당신의 등을 보면서 사는 일을 시작하고 싶지가 않아. 처음엔 다 그래. 당신을 얻는 것은 세상을 얻는 것이라고 그 사람도 말했던 시절이 있었어. 결혼 오 년 만에 다른 여자한테 갔어. 가서 똑같은 말을 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