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에 보니 밥그릇이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우리 집에 고양이가 찾아와 밥을 먹고 갔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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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 아내와 내가 제일 먼저 고양이 먹을거리로 생각했던 게 생선이었다. 옛 속담이며 노래 가사에 나오듯 고양이에겐 무조건 생선만 주면 되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고양이에게는 생선보다 닭고기, 오리고기, 소고기와 같은 식단이 더 필수적이다. 특히 추운 계절에는 지방을 섭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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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마리 고양이가 불쑥 내 인생으로 뛰어들었다. 앞으로의 내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이 숙명적인 만남. 그 존재의 정체를 밝혀 내기 위해 일 년 반 동안 집념을 불사르게 된 사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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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게 오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이런저런 걱정을 하게 되었다. 때로 몰골이 조금 지저분해져 나타난 날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마음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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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턱시도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가족으로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그즈음 입시를 앞두고 점점 대화가 없어지고 있던 아이들의 빈자리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아내에게 있어 아이들-고양이-남편이었던 집안 서열에서 드디어 턱시도가 첫 번째로 등극했다.
--- p.24
집에 돌아오자마자 미셸의 새로운 식당을 위한 재료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바닥은 방수 기능을 살려주는 대리석으로, 큰 플라스틱 박스는 밥집으로, 그리고 캐노피 역할을 하는 뚜껑을 설치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아늑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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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라는 것이 고양이를 통해 새로이 형성되고 확장될 수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이가 맺어 준 관계, 이런 관계도 존재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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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습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천양지차인 것 같다. 내게는 고양이가 그랬다.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내가 미셸이란 녀석을 통해 관심을 넘어 탐구를 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나는 생명체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버림받고 학대당하는 동물의 실상은 물론,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개나 고양이에 대한 인식의 정도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 p.59
그리고 참으로 신기한 경험을 했다. 처음엔 도움이 필요해 보였던 미셸에게 우리가 손을 내밀었지만 결국 그러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존재는 미셸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 p.59
미셸은 우리 가족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선사했다. 가장 큰 선물은 아이들이 다 자란 이후에 대화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던 우리 가족의 중심에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었고, 순수한 애정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을 떠날 즈음엔 많은 이웃들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게 해주었다.
--- p.60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미셸이 늘 넘어 다니던 담 아래에 웅크려 앉은 자세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던 것처럼. 평소였다면 저렇게 편히 앉아있을 리가 절대로 없고 진작 몸을 피했을 녀석이었다. 핸드폰에 장착된 라이트를 켜서 비추었는데도 미셸은 차분한 모습으로 응시했다. 그러면서 계속 애절한 소리를 냈다. 반갑고 보고팠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예전에 그렇게 오랫동안 보면서도 미셸의 목소리를 들어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우리 부부에게 그날은 정말로 특별한 날이었다.
--- p.88~89
길고양이들을 중성화하는 방법도 이젠 제법 터득했다. 때가 되면 지역 구청에 신청하고 예산이 남아있는 동안 전문 구조자가 포획하여 시술 후 다시 제자리로 보내준다. 중성화를 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 또한 애처롭기 그지없다. 포획 틀을 설치하기 하루 이틀 전부터 밥집에 준비하는 사료 양을 줄이고, 포획 후 사진을 찍은 다음 구청과 계약된 동물병원으로 데려간다. 시술 후 방생 전에 보름 정도 약효가 지속되는 항생제를 투여하는데 거세를 당한다는 것은 암컷이든 수컷이든 고양이에게는 고통 그 자체일 것이다. 그나마 방생 전에 영양제를 주사하고, 피검사를 통해 질병 유무를 확인하여 치료를 해줄 수 있어 다행이다.
--- p.112~113
생명을 다루는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녹록지 않은 과정을 거쳐 중성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역을 달리하여 밥집을 차려 주는 것이 필수다. 밥집이 있어야 길고양이들의 루트를 확보할 수 있고, 그로써 포획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된다.
--- p.115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개를 빗대어 욕하는 언어 습관을 고치면 좋을 것 같다. 언어로도 개에 대해 존중해 줄 수 있다면 좋지 아니한가. 나는 앞으로도 쥐새끼, 벌레 같은 놈으로 대신하려 한다.
--- p.161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특히 부모들은 자녀가 동물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입양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다 더 신중을 기했으면 한다. 개와 고양이는 이제 15년 정도는 너끈히 살 수 있다. 사료의 보급과 의료 기술의 발달로 동물의 수명도 덩달아 길어진 것이다. 이런 생명체를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덥석 반려동물로 삼을 일이 아니다.
--- p.191
개를 번식시키고 도축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동물학대와 생명체 경시 풍조는 물론이고 위생, 환경, 건축, 납세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합법적인 것이 없다.
--- p.194~196
반려동물이란 생명체를 하나의 패션이나 소장품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번식되는 개체 수, 분양되는 개체 수, 그리고 유기되는 개체 수가 지나치게 많다. 이렇게 양산된 생명체 하나가 유기될 경우 제대로 회복되기 위해선 구조, 치료, 입양 등으로 이어지는 긴 시간은 물론 상당한 비용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2014년부터 시행된 반려동물 등록제와 동물관리보호시스템, 훈련 프로그램 의무화가 정착되어야 할 시점이다.
--- p.218
개와 고양이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현실은 너무 고전적일 만큼 진도가 늦다. 너무 더뎌서 답답하기까지 하다. 생명에 관련된 이슈는 비단 보수,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가치에 대한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일 뿐임에도 우리 현실은 이데올로기의 한 주제처럼 다루어지는 게 아쉽기만 하다.
--- p.224~225
우리나라 동물복지 문제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공급을 제한하면 부수적으로 전개되는 유기견, 동물학대 문제 역시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나아가 이웃 간의 마찰과 범죄 감소에도 영향을 미친다.
--- p.225
1미터짜리 사슬은 결코 행복의 사슬이 아니다. 반려견의 행복을 옥죄는 쇠사슬은 무조건 제거되어야 한다. 개 식용 종식이란 커다란 숙제가 완성되는 날, 나는 지체 없이 시골로 내려가 그 쇠사슬을 없애는 데 힘을 쏟으려 한다. 꼭 그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으며, 늘 꿈꾸는 소망이다.
---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