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삶, 생각)을 읽게 만든다.”
이 책 『행복한 책읽기』는 김현의 유작이지만, `김현의 책읽기'에 대한 키워드를 제시하는 중요한 입문서이다. 1985년 12월 30일에 시작되어 1989년 12월 12일에 끝난 김현의 이 (독서)일기에는, 책읽기를 통해 `삶의 구체성'에 다가가고자 한 성실한 인문주의자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
어쩔 수 없는 `책상물림'으로서 그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 있는 긴장관계를 책읽기를 통해 확인하고, 그 반응으로서의 사유를 글로 써내는 일상을 영위했고, 이 일기는 그 일상의 자연스런 소산이다. 누구보다도 빨리 읽고, 빨리 쓰곤 했다는 김현은 이 일기를 통해 당대 작가들(특히나 한국작가)의 시, 소설, 비평서, 철학서, 사회과학서, 고전 작품 등에 대한 깊은(그러면서도 때로는 헐렁한) 사유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기록.
“황동규의 『악어를 조심하라고?』(문지, 1986)도 활달하지만 직관의 깊이가 있다. 그 깊이를 성숙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명료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깊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의 (직관의) 깊이는 `계단을 기어올라가 옥상 난간에 뜨거운 배를 대고' 있는 악어의 시선의 깊이이다. 그 높이 있음이 별을 향한 초월적 바람의 의지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갈 수 없다는, 그러나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하강적 바람의 의지라는 데 그의 시의 특징이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높은 곳에 있다. 그러나 나는 내려가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높이 있는 자로서의 부끄러움을 그가 직관적으로 잡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그러한 부끄러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마음을 따라 읽어가다, 제 마음의 움직임을 느끼고, 그를 움직인 시인의 마음과 만나는 자리가 `어쩔 수 없이 높은 곳'에 있지만 `내려가'고자 하는 `나'로서 표현되는 이러한 문장은 새록한 감동을 준다.
하지만, `최소한의 수준은 보여주고 있다', `읽을 만하다', `깊이가 없다', `수준이 고르다/고르지 못하다', `읽힌다/안 읽힌다' 등의 표현을 통해 젊은 작가들을 평하는 그의 태도에는 20여 년간이나 대가의 자리에 있었던 그의 이력이, 그가 비판해마지 않았던 `사제적 권력'으로서 `김현 비평'이 상징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한 측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의 일기 읽기를 즐겁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15년 전 그가 평했던 작가들에 대한 짧은 기록들과 그들의 현재를 짚어보는 것이다.
가령, “복거일이 자신의 원천 중의 하나: 영어를 잘 한다는 것. 『비명을 찾아서』나 『높은 땅 낮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제일 환희를 느끼는 것은 어려운 영어책이나 영어 편지를 잘 읽고 쓸 때이다”라는 지적은 훗날 복거일이 주창한 영어공용화론에 생각을 잇게 하고, 장정일에 대해 “그가 이인성, 박인홍이 그것을 뛰어넘듯이, 그것을 뛰어 넘어 역사와 삶의 깊이에 이를 수 있을까? 그의 세대를 뭐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사이키델릭 세대? 그가 섹스 과잉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쓴 대목은 실제로 10년 후 장정일이 `섹스의 과잉' 작가라는 혐의를 뒤집어 쓴 필화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행복한 책읽기'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김현의 독서일기'가 아니라 `김현의 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유는 영화나 음악, 공연물에 대한 짧은 평 그리고 이런저런 생활의 단상들이 이 책을 채우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영화나 음악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인상을 기록한 수준이다. 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상의 원천은 거의가 책읽기에서 나온 사유와 닿아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김현의 독서일기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짚어 보자. 남의 일기, 그중에서도 책에 대한 개인의 사유를 정리한 독서일기를 찾아 읽는 가장 원칙적인 목적은, 타인이 행한 독서에 대한 호기심, 나아가서 그 호기심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적극적인 유용성의 발로일 것이다. 사유을 훔치며, 확인하며, 자극받아 행해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에 대한 욕망. 이쯤 닿으니 갑자기 『아라비안 나이트』가 읽고 싶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