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에 비해 고소 사건이 인구 비례 44곱절에서 250곱절까지 많다. 모두 언론의 보도이거나 전문 연구자들이 제시하는 자료이므로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분쟁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책의 주제인 부모 자식 간, 이렇게 볼 경우,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다. 부모 자식 간 갈등, 분쟁, 이것이 일본 사회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런 쪽 연구를 찾아본 적이 없어서 나 자신의 체험적 판단을 제시할 수밖에 없지만, 나의 결론은 바로 헬리콥터 부모와 캥거루족 자식이다.
모든 수고를 다 바쳐 자식을 캥거루 새끼로 키워 내고야 마는 부모들은 자신들이 바친 수고에 대한 반대급부를 바란다. ①자식들이 자라는 동안에는 부모에게 복종하여 부모의 기대를 채워 줄 것을 기대하고, ②자신들이 나이 든 다음에는 자식들에게 의지하려 드는 게 그것이다.
그런데 ①과 ②양쪽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 갈등과 분쟁 이유만 된다. 서로가 서로를 구속한다. ②쪽으로 잠깐만 더 눈을 돌려 보기로 한다면, 차츰 더 이기적이 되어 가는 추세에 따라 앞으로 더욱더 불가능한 기대가 될 것이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정신적인 면에서, 이를테면 부모가 자식에게 약간의 위안이나마 기대한다 해도 그것이 망발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①과 ②양쪽 모두 아예 마음도 먹지 않아야 하고, 자식을 정서적 불구로 만드는 것 이외에는 백해무익한 헬리콥터 부모 노릇도 그만두어야 한다.
--- pp.57~58
‘눈높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고 누구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는데,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위대한 개념이다. 비단 부모 자식 관계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경험하게 되는 갈등의 상당 부분은 눈높이를 맞추는 평등 구현 노력의 실패로부터 비롯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인간관계에서 아주 유용한 지혜가 있는데, 그것은 곧 상대방 눈높이에 나를 맞춰 보는 평등 구현 노력을 뜻한다. 이 노력을 통해 평등한 입장에서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쪽이 되기만 해도 갈등의 쌍방이 되어 서로 고통당하는 경우는 상당 부분 피할 수 있게 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더욱더 그렇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부모가 자식의 눈높이를 무시한 채, 자기 눈높이에서 자식을 내려다보며 명령하고 억압하고, 마침내는 폭력 행사도 마다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눈높이를 맞춰 같은 눈높이에서 동년배 친구처럼 평등한 입장이 될 경우, 그 명령도, 그 억압도, 그 폭력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물론 내가 뭐랬니? 내가 그랬잖아! 거봐, 못써, 안 돼, 이 멍텅구리 같은 등의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악성 불평등 언어도 발사될 수 없다. 곧 갈등의 근원이 제거된다.
평등한 상태에선 위와 아래가 구분되는 수직 상태가 아니라 눈높이를 함께하는 수평 상태에서 만나게 된다. 수직 상태에서는 위도, 아래도 사실은 불편하다. 위는 아래로부터, 아래는 위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수직이다. 관계가 삭막해질 수밖에 없다. 노장청老壯靑이 함께 어우러져 즐길 수 있는 대동 세계는 수평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평등은 모든 인간관계의 이상적理想的 상태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만 우리는 저 갑갑한 만성 주눅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이상적 상태인 평등한 친구가 되는 이러한 노력도 물론 모든 면모에서 유리한 입지에 있는 부모 쪽의 관용과 기교와 적극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관계의 주도권을 언제나 부모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과 눈높이가 어긋나지 않도록, 그래서 언제나 대등한 친교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할 때 부모 자식 사이 갈등은 현저히 줄어든다. 그리고 이 평등은 바로 진정한 사랑이 가능한 절대적 전제가 된다.
--- pp.89~90
나는 지금 방목을 찬양하고 있는 셈인데, 그러나 그 방목은 물론 방종을 뜻하지 않는다. 자율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거룩하지도 않고, 심지가 굳지도 않다. 방목이 방종으로 되지 않도록, 적절한 금 긋기가 필요하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Fine Country’ 싱가포르는 ‘Fine Country’이다. 앞의 ‘Fine’은 ‘좋은’이라는 뜻의 형용사이고, 뒤의 ‘Fine’은 ‘벌금’이라는 뜻의 명사다. 싱가포르의 관광 상품 가운데 하나인 ‘벌금 셔츠’를 보신 분들도 계실 듯한데, 싱가포르는 그야말로 벌금 천국이다. 구제 불능이라 하여 말레이시아로부터 쫓겨나, 1965년 어쩔 수 없이 독립해야 했던 싱가포르가 단시간에 말레이시아를 훨씬 더 능가하는 부자 나라가 된 것은 바로 그 ‘벌금’ 제도를 포함한 철두철미한 타율 때문이었다. 싱가포르 초기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변을 보는 사람들이 흔했다. 그것도 벌금으로 바로잡았다. 그 나라에서 벌금의 효용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 같다.
대형 매장의 카트에 코인 하나 넣도록 되어 있는 것, 그 시작은 프랑스의 어느 매장이었다. 아무리 간곡히 부탁해도 카트는 마구 흐트러지기만 했다. 매장 직원 하나가 코인 아이디어를 냈다. 그 뒤부터는 카트 정리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이 단순한 아이디어는 세계 모든 나라로 퍼져 나갔다.
내 어린 시절, 산은 모두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큰비가 내리면 강에는 황톳물이 넘실거렸다. 초가지붕에 돼지가 얹혀 떠내려가는 풍경을 본 적도 있다. 정부에서는 강압적 방법으로 모든 아궁이를 틀어막은 다음, 나무 대신 연탄을 연료 삼도록 했고, 그제야 비로소 산에서는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적정량의 타율이 없으면 사회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그 타율도 적정량을 넘어서면, 전제 체제가 되고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문제는 적정량인데, 그 기준이 쉽지 않다. 치자治者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자식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적정량의 타율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 기준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저마다 개성이 다르기 때문이고, 부모와 자식 사이 관계 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적정량의 타율은 부모가 정할 수밖에 없는데, 타율은 더 적을수록, 자율은 더 많을수록 좋다. 타율이 적을수록 인간은 더 자율적이 된다(소화제 효과). 자율은 자라는 생명에게 최대의 덕목일 수 있다. 다 자란 뒤에도 마찬가지다. 제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어른들이 뜻밖으로 많다. 헬리콥터 부모와 캥거루 자식이 대세가 되어 갈수록 더욱더 많아지고 있다.
--- pp.10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