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광고홍보전공 교수다.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광고대행사 한컴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SK텔레콤 홍보실로 옮겨 광고홍보 관리 업무를 수행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테네시대학교와 미주리대학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이해』, 『방송광고 장르론』 등을 공동 집필했고, 『광고와 예술』, 『플랫랜드』를 우리말로 옮겼다. “The border-crossing of habitus: media consumption, motives, and reading strategies among Asian immigrant women in South Korea”, “신명커뮤니케이션 서설” 외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한국문화의 원형질로 여겨지는 신명을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천착하여 우리 나름의 ‘신명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정립하려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다.
1970년에는 TV-CF 한 편의 제작비가 보통 15만 원 했어요. 그걸 제가 50만 원으로 올렸죠.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았지. 신인섭이가 15만 원을 떼먹었다고요. 나는 술은 얻어먹었지만 돈은 한 푼도 받질 않았어요. 그래서 요새도 이렇게 골골골하잖아요, 하하하. 당시 50만 원이면 커요. 택시 기본요금이 60원 하던 때였으니까요. ---「신인섭(별표 백등유 광고 제작 당시를 회상하며)」중에서
오리엔탈 커뮤니케이션스라고 알아요? 이게 오리콤이죠. 처음에는 오리콤이라는 이름을 모르고, 어떤 직원이 나한테 “아, 여기 싱크대 회사죠? 오리표 싱크인 줄 알았어요.” 그러길래, 뭐 그냥 그렇다고 그랬죠. 그런데 나중엔 오리콤이란 이름이 유행이 돼서 ‘콤’이라는 단어를 쓴 광고회사들이 많이 생겼죠. ---「김석년(오리콤이라는 이름의 배경에 대해서)」중에서
코카콜라 캘린더를 만드는데, 일본 샘플을 몇 개 가져와 제 방 벽과 천장에 다 붙였어요. 그걸로 구상해서 촬영하고 캘린더도 만들고 광고도 했어요. 물론 일본 원판을 가져다가 쓸 수도 있었죠. 하지만 제 생각은, 한국에서 어려워도 여기서 시작해야 우리가 발전한다는 거였어요. ---「이병인(만보사에서 코카콜라 광고를 대행하던 시절을 회상하며)」중에서
그때 우리는 “제일기획에 광고를 의뢰해 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광고회사라는 곳은 이런 일을 하고, 광고회사와 광고주와의 관계는 이러이러한 관계다”라고 설명했어요. 광고주가 “당신들은 어차피 신문사에서도 수수료 받고 방송국에서 더 받을 것 아니냐? 그럼 우리도 손해 보는 것 아니냐?” 이렇게 반박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설명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남상조(광고대행 수수료 제도의 도입 당시를 회상하며)」중에서
코카콜라 광고는 처음부터 컬러로 찍었어요. 당시 컬러합성이라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코카콜라 광고주는 그림은 잘못돼도 로고의 빨간색이 핑크색으로 나오면 안 됐어요. 무조건 다시 해야 했죠. 원남동의 아그파 필름에 가서 시도했는데 찍을 땐 분명히 빨간색이었는데, 프린트하면 핑크색이나 자줏빛이 나와 환장할 일이었죠. ---「윤석태(만보사 시절 코카콜라 광고 제작 당시를 회상하며)」중에서
1973년에 동양방송(TBC)과 삼성그룹이 제일기획을 만들었죠. 이걸 보고 MBC 중역들이 위기감을 느껴 연합광고를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광고물량에서 우리가 이겼죠. 오리콤, 제일기획도 우리 다음이었고.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 광고주가 자체 광고회사를 만들면서 회사가 어려워진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