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친구들. 건투!!
최성혜(cocomo@yes24.com)
2006-11-29
사람이 그렇듯, 책에도 인연이 있다. 김형경의 <사람풍경>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배속에 아이를 품고 지역 도서관을 들락날락 할 때였다. 번번이 대출순서를 놓쳐 결국 책은 손에 대보지도 못하고 아이를 출산하러 갔다. 그리고, 다시 배속에 아이를 품고 올해는 (운좋게도!) 그녀의 책을 거머쥐었다.
김형경의 심리여행 에세이에 솔깃했던 이유는, 그보다 몇 해전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출간후 그녀와 함께한 인터뷰 때문이었다. 인터뷰 내내 그녀는 더할 수 없이 해맑고 활기찼는데, 마치 그쪽이 20대고 이쪽이 30대 중반이 된 듯 했다. 어쩜, 저리도 싱싱하고 박력있나 놀랐던 기억 한편엔, 집 한 채를 팔아 다녀왔다는 그녀의 여행이야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니 소설보다 한참 늦게 펴낸 그네의 여행담, 그것도 내면과 맞대응한 심리에세이란 책소식에 금새 마음이 동했으리라.
지금으로부터 일년 전, 나는 첫 아이를 낳고 어정쩡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때로는 이렇게도 살아지는구나 덤덤하기도 했고, 더이상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부담스러웠던 건,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내 마음 어딘가가 훼손되어-그렇다, 훼/손/되/었/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피폐함이 있었다-어떻게 살아가야 좋을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출산 때문도, 갑자기 두 어깨에 실린 육아부담 때문도 아니었다. ('따귀맞은 영혼'이 그렇듯) 어쩔 수 없이 큰 상처를 받아서, 꼬이고 꼬인 실타래를 풀다풀다 지쳐 마침내는 이런 것이 "사람일"이라는 체념에 젖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후 찾아온 증상이었다. 그때 어쩌면, 절실하게 이 책이 필요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풍경>은 그 뒤로 한참은 더 지나서 내게로 왔다. 2006년 11월, 이즈음에.
고백하건대, 책읽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녀가 이처럼 지적이고 명백하며 백과사전적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마냥 행복하고, 마냥 밝기만 해 주위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자신의 그늘을 감추게 만들던 그녀였건만, 이 책에서 만난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칠칠맞고, 겅중겅중하고, 빈틈이 많아 보였던 그녀가(왜 웃고 있으면 사람이 쉬워 보일까?......) 이 책에서만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이도 안 박힐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정색하고 자신을 반문했으며, 지난 상처를 끄집어내고, 곱씹고, 어루만졌다.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때까지 여행했던 각 처소에서, 미노스의 미궁을 빠져나오려 애쓰는 테세우스처럼 자신에게 향하는 실패를 꼭 붙잡고 있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불쑥 울음이 터졌을 때는 무엇이 자신을 울게 했는지 2년이나 궁구한 끝에 해답을 찾았다고도 했다. 책은 어른 김형경이 아이 김형경에게 내려가도록 파놓은 우물처럼/외딴 우물처럼 꼭 그만큼 밀폐되고, 그렇게 내밀했다.
그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에 대해 언급하고 이어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선택된 생존법들'을 다뤘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유지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들'에 대해 나열했는데, 그 세 단계를 따라 밟다 보면 어느새 한 사람이 가진 상처와 고통, 긍지와 좌절, 기쁨과 절망이 고스란히 보였다. 우리의 내면을 찬찬히 돌아보기에 알맞은 짜임과 서술, 그리고 적당한 정도의 심리학 지식이 배합되어 짜고 달고, 쓰고 매웠다.
이만치 정확하고 명료하게 인간 감정을 서술할 수 있음에(그래서 이전보다는 덜 힘들이고도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음에) 나는 길게 안도했다. 가령, '우울-정신의 착오, 혹은 마음의 요술부리기', '공포-분노가 가면을 쓰고 다른 대상에게 옮겨진 것', '질투-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감 없음', '뻔뻔하게-유아적 환상없이 세상 읽기', '친절-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지켜보기', '용기-절망 속에서도 전진할 수 있는 능력' 같은 정의가 호들갑스럽지도, 사전적이지도 않아 마음에 들었다.
일년 전, 힘없던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얼마나 기뻤을까 상상해본다. 다소 늦게 접하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읽었으니 그나마 다행인데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안타까운 거다. 그때 마음이 허공을 떠돌 때, 좀더 일찍 <사람풍경>을 만났더라면 덜 방황했을 걸 하고.
김형경은 여행을 다녀온 후, 막막한 마음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해 하루하루가 허당을 밟는 듯 했다고. 여행에서 자기가 느꼈던 감정, 타인의 상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곤란했던 일을 차곡차곡 정리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고. 그래서 이 책은 희망적이다.
마지막 장에 '긍정적인 가치들'을 둘레둘레 늘어놓은 것도 그렇고, 그 가치들이 끝없는 자기희생을 통해서나 또는 무작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그렇다. "용기"가 '절망 속에서 전진할 수 있는 능력'임을 알았다면, 이제와 용기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때 절망했다손 치더라도, 그 속에서 걸어나올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가.
삶이란 주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하루하루 애써 싸워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기에 오늘 하루도 새롭게 벅차다, 그리고 힘들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며, 또 그 사람에게서 위로받고 희망을 얻는다는 사실을 (일면으로서가 아닌, 총체적으로) 이해한다면 상처는 언제나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그러했듯, <사람풍경>이 당신에게도 그런 역할을 해줄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러니, 친구들. 건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