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2월 4일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한재에서 출생. 2살 때 나주군 문평면 옥당리로 이사하여 유년시절을 보냈다.
1982년_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전력 입사 2007년_ 월간 한울문학 시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2009년_ 한국문화예술유권자총연합회 문화예술대상 금오문학대상 수상 2010년_ 네이버 인물백과사전 시인 등재 2012년_ 한국방송통신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2016년_ 한국남부발전 퇴사 2017년~ 신성콘테이너 대표
_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오랜 지병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고등학교 진학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문학을 접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_가정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 학비를 비롯한 생활비까지 모두를 제공해 주는 한전계열 이공계 고등학교에 입학,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안정감을 찾으며 천성적인 문학 감수성이 돋아나 학교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문학책들을 미친 듯 독서하면서 내재된 정서에 대한 표현의 기초를 닦았다.
_30대 후반에 찾아온 부모님들과의 이별, 그리고 어린 자녀를 둔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이혼의 큰 충격으로 방황이 시작되었다. 지방근무(하동화력발전소)의 환경으로 인해 주변에 널린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등등을 짐승처럼 뛰어다니면서 속에 쌓인 증오심들을 토해냈다. 내부가 텅 비어버린 머릿속에서 시상이 급격하게 발아하기 시작하였다.
_40대에 늦게 들어선 시인의 길이 마치 오래되어 세상에 찌들고 탄화되어버린 플라스틱 도구처럼 변했고, 詩作의 프레임은 쉽게 그리나 섬세한 다듬기에 불편함이 크게 느껴져서 시문학의 조예를 키우기 위해 다시 영문학에 뛰어드는 만학의 길을 선택했다.
_등단 후 한때는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겨 후진 양성이라는 의지를 앞세우고 SNS상 詩作 지도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詩의 경지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내가 써 놓은 지난날의 글들마저 유치하기 짝이 없게 느껴져서 한 때는 일부러 글에서 저만치 멀어져 가 있어도 보았다. ‘詩人’이라는 명함이 오히려 멍에가 되어 자유로운 사색의 유영을 방해하고, 함부로 얕은 생각들을 옮겨서 탈고할 수도 없는 브레이크작용을 하는 것도 같았다.
_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음미하지 않는 삶은 인간의 가치가 없다’라고 했듯이, 고뇌없이 知的인 조작이 가해지지 않는 詩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 한 편 한 편을 산행에서 8부능선 깔딱고개를 넘는 처절한 사투의 심정으로 살아온 고뇌의 기억들을 덧씌워 그려낸 작품들이지만 막상 세상에 내놓으려니 부끄러움이 앞서서 머뭇거리다가 이제야 출판을 결심했다. 애써 지어 놓은 작품도 그저 시작 노트에서 세상 밖으로 꺼내놓지 못하고 묵히기만 하는 시들이 몇 곱절 많은 것이 시인들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