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지도자가 품고 준비한 꿈은 벼랑 끝에 놓인 국가의 위기도 기회로 바꿀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백제의 25대 왕인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의 등장은 백제 역사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무령왕은 백제가 수도인 한성을 고구려에 빼앗기는 참패를 당하고, 지금의 공주로 내려가 재기를 준비했던 웅진(熊津) 시대의 네 번째 왕이다. 피로 얼룩진 선왕들의 죽음으로 시작된 웅진시대. 그 출발은 결코 화려하거나 영광스럽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그러한 난국을 어떻게 극복하고, 백제를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일까? 무령왕의 파란만장한 삶과 꿈을 살펴보자. --- p.16 무령왕 편 중에서
520여 년의 조선 역사를 이끌었던 임금은 모두 27명, 왕후는 37명이었다. 조선의 임금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만 왕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또 몇몇 왕후는 궁중 암투의 주역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 초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왕후가 있었다. 바로 수양대군 세조(1417~1468)의 부인인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다. 정희왕후는 세조, 예종(1450~1469), 성종(1457~1494) 등 조선의 세 임금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세조의 부인이자 예종의 어머니, 그리고 성종의 할머니였던 정희왕후는 특히 성종 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정희왕후는 평범한 사가(私家)의 막내딸이었다. 사가 출신의 그녀가 어떻게 왕후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 p.48 정희왕후 편 중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유명한 양반가의 딸로 태어나 글과 학문을 마음껏 익혀 이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시를 썼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 허난설헌의 세 가지 한이었다고 말한다. 허난설헌은 왜 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한스러워 했을까? --- p.74 허난설헌 편 중에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1552~1617)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의외로 적은 편이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으로서 훌륭하게 잘 싸웠다는 정도가 곽재우에 대한 인식의 전부다. 사실 곽재우는 홍의장군으로서 영광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초야에 묻혀 지내던 선비였고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당시엔 오히려 조정의 의심까지 샀다. 그의 일생은 시대에 의한, 피치 못한 선택이었다. --- p.98 곽재우 편 중에서
1845년, 한 프랑스 사제가 조선 땅을 밟는다. 성 다블뤼(St. A. Daveluy) 주교였다. 그는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다가 박해를 당한 천주교의 성인이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신도들에게 믿지 못할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이미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파시킨 자가 있다는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이 놀라운 사실을 『조선순교사 비망기』라는 제목으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한국에 천주교 신앙을 전파한 선구자, 그의 이름은 광암 이벽이었다. --- p.126 이벽 편 중에서
발해 하면 일반적으로 고구려 후예 대조영(大祚榮 ?~719)이 세운 나라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나라였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이 있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해외 원정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 상대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당나라였다. 신생국인 발해가 어떻게 당나라를 선제 공격할 수 있었을까?그 유례없던 정벌을 지휘했던 사람은 바로 대조영의 맏아들 무왕 대무예(大武藝 재위 719~737)였다. --- p.156 무왕 대무예 편 중에서
황제는 여러 왕국을 다스리는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발해가 건국되었던 1300년 전 황제라는 말은 중국에서만 쓰인 호칭이었다. 그런데 황제임을 공언했던 발해왕이 있었다. 대조영의 손자이자 발해의 3대왕이었던 문왕 대흠무(大欽茂 ?~794)다. 대흠무가 황제라는 호칭을 쓴 것은 발해가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선언한 것으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일이었다. 문왕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 p.184 문왕 대흠무 편 중에서
사람들은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을 가사문학의 일인자로 손꼽는다. 그가 쓴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은 지금까지도 한국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대단히 높게 평가받고 있다. 정철이 이룩한 문학적 공로와 명성을 생각하면 정치인으로서 송강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정철은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조선시대 최대의 정치 참사로 일컬어지는 기축옥사(己丑獄事), 1000명의 조선 선비들이 죽임을 당한 그 회오리바람의 중심에 바로 정치인 송강 정철이 있었다. 천하의 문객이 왜 이러한 비극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일까? 잔인한 죽음들과 관련된 송강의 행적은 후세에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다. --- p.216 정철 편 중에서
한글 창제, 집현전 설치, 수많은 과학기구 발명 등, 세종대왕은 그야말로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나라를 물려받은 것은 1418년으로, 조부인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채 30년도 되지 않던 시기였다. 모든 것이 아직은 혼란스러운 건국 초기, 게다가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 또한 매우 피폐했다. 그런데 세종은 이 난국을 극복하고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고 설파했던 민생군주 세종을 만나보자. --- p.242 민생군주 세종 편 중에서
조선의 왕이 음악을 중시했다는 사실이 낯설지만, 세종은 분명 조선의 악성(樂聖)이었다. 우륵(于勒), 왕산악(王山岳), 박연(朴堧 1378~1458) 등 우리 역사에 음악으로 이름을 남긴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 음악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고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이 중에 세종을 빼놓을 수 없다. 실제 세종은 직접 작곡한 곡의 악보를 실록에 남기기도 했고, 박연에게 악기를 새로 만들고 궁중 음악을 정리하도록 했다. 이제 막 창업한 새 나라 조선의 문물을 정비해야 했던 세종이 음악에 매달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소리, 조선의 음률을 찾기 위해 밤을 새웠던 세종의 색다른 면모를 살펴보자.
--- p.272 조선의 악성 세종 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