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사는 곳에 따라 천상계의 천선天仙, 지상계의 지선地仙, 인간계의 인선人仙으로 불린다. 수선水仙의 경우는 수중계의 신선이라 하겠다. 신선 하면 흰 수염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떠오르지만, 사실 중국 고전에는 미소년 미소녀 신선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중국에서 수선은 언제부턴가 꽃 이름이 되었는데, 아마도 습한 땅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리라.
--- p.11
동백꽃을 노래한 동요로는 이런 것도 썩 마음에 든다.
땅위에 톡
작은 소리가 굴러 떨어졌다 또 들린다 톡
덧문을 열고 찬찬히 보니 아아 동백꽃
정서가 너무 끈끈하지 않고 오히려 추상적인 여운이 있는 이런 노래가 나는 좋다.
--- p.22
박물학을 사랑하며, 무엇보다 동식물 수집품을 끔찍이 아꼈던 16세기 합스부르크 가문 황제의 손에 튤립 알뿌리가 도착하자, 이윽고 튤립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멸종한 도도새 그림으로 유명한 황제의 화가 룰란트 사베리의 화려한 튤립 그림도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튤립이야말로 마니에리슴의 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p.45
장미를 상징으로 하는 심벌리즘도 꼽기 시작하면 셀 수가 없다. 헬레니즘과 중세 기독교, 우화문학과 연금술, 왕가의 전쟁과 성녀 전설, 단테와 보티첼리, 문장紋章과 정원, 스테인드글라스와 향수, 릴케와 슈트라우스, 이 모든 것들이 장미 이미지와 함께 곧장 떠오르는 이름이니. 장미야말로 세계에서 으뜸가는 상징주의의 여왕이 아닐까 싶다.
--- p.128
수국은 시들어도 웬만해서 지상으로 꽃이 떨어지지 않고 바삭바삭 말라가며 자연스럽게 드라이플라워가 된다. 꽃잎은 녹색을 띠면서 수국의 유령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아서 이 천연 드라이플라워를 가위로 잘라 유리병에 시원스레 꽂아두곤 한다.
--- p.146
이 책은 한 일본작가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꽃에 대한 기억을 기록한 산문이다.
고대와 중세 유럽, 서아시아와 중국을 지나
일본에 이르기까지,
고전문학과 예술 속에 면면히 이어온 꽃의 형상이
읽는 이를 즐겁게 한다.
차라리 꽃과 식물을 향한 지적인 탄성이다.
저자는 시부사와 다쓰히코澁澤龍彦(1928~1987).
프랑스문학 번역가이자 서양 미술과 문화사에
해박한 저술가.환상소설 소설가이자
『피와 장미』라는이상한 잡지를 창간한 편집자.
지식콜렉터, 살아있는 도서관,
사드 저작을 번역해 사회 풍기문란을
조장했다는 죄로 재판을 받았으며,
오랜 벗 미시마 유키오에게 세기말 사상을
수혈하기 위해 번역과 저작에 힘썼다는,
자기 취향과 기호, 때로는 우정에 모든 걸
쏟아 부었던 인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저작과 신화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맹목적인 혼이 배어든 예술품과
건축물과 정원을 아끼며,
인류 업적 중에서도 조금 비뚤어진 데카당과
어둠의 세계사에 매력을 느끼는 한편,
와카와 하이쿠와 동요를 흥얼거리고,
환상적인 것들,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들을
수집하고 해석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수선화와 동백꽃을 시작으로 자기 생에서
꽃과 이어진 모든 기억과 지식을 풀어냈다.
책과 전설과 여행과 시와 노래......
기억의 실패에 감긴 실을 풀듯 쓴 산문이었다.
이를 2년여 연재하다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책에서는 용의 세계를 꿈꾸었지만 일상은
의외로 소박했던 한 인간의 역사와,
그가 사랑해마지 않던 인류의 문화사가
스물다섯 편의 플로라 산문에 녹아들었다.
글과 함께 실린 그림은 그보다 먼저 살다간
18~19세기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이들 동서양 꽃 그림은 한 애서가의 서재에서
편집자의 손에 이끌려 세상으로 나왔다.
다쓰히코의 담담한 글과 절제미로 가득한
옛 사람들의 그림이 조화롭다.
모두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들의 결실이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