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는 세기가 바뀌며 열린 2002 한일 월드컵으로 붕 떠서 시끄럽던 즈음의 대학 문예 행사에서 문학의 바깥을 향해 투정하듯이 붙인 강연 제목이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바로 더, 나 자신을 향해 삭여야 할 다짐이 될 듯하다. 그래, 내가 문학의 시든 허세에 섭섭해하고 그것의 주변화를 피할 수 없는 예감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리고 세계 자체가 문자보다 더 격렬하고 솔직할 수 있음을 시인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여전히 우리 앞에 살아, 남아 있어야 할 일이며 그 이유들에 우리는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이 대꾸는 안쓰럽고 안타까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사위는 잿불에 불어주는 작고 조심스런 입김이 되기를, 나는 지금 나 스스로를 위해 바라고 있다. --- 책머리에 중에서
저는 이 엄숙하고 고통스러우며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과 꿈을 키우는 문자 예술로서의 문학이 여전히, 살아남아야 하며, 살아남아 있음으로써 우리의 의식과 정신, 정서와 꿈으로 우리 내면 속에서 움직거려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학을 구분하기 위해 진지한 문학이란 이름으로 불러봅니다.
이 진지한 문학이 그럼에도 상존해야 하는 이유는 세계와 문명 그리고 삶의 행태와 인간의 욕구가 진지한 문학의 존재를 그 뿌리로부터 줄기와 잎새와 꽃과 열매까지 두루두루 위협하고 있고, 그래서 그 생존이 위기에 닥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것을 허물고 짓누르려는 세력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진지한 문학이 이런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내야 하듯이 그것도 구조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불변하는 가치,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이 구조의 작업은 보다 막중한 작업이 되는 것이며, 그 작업은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가오는 문명적 힘들과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것은, 마치 전체주의적 세력 앞에서 지켜내야 할 자유의 정신처럼, 시장 경제의 타락 속에서 추구해야 할 평등의 이상처럼, 문학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불가결한 덕성과 창조에의 열정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학은 인간을 사물화하는 기능주의, 사람을 기계로 전락시키는 속도주의, 인류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획일주의에 대항하는 아마도 거의 유일한 휴머니즘으로서의 역할과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지한 문학이 우리에게 일구어주는 반성적 사유, 창조적 영감, 초월에의 꿈, 인간다움의 덕성은, 달리 그리고 어느 다른 곳에서는 얻어낼 수 없는 인류의 고결한 정신의 영원한 원천입니다. ---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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