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소리만으로 모두를 구분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일상적이지 않은 움직임까지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패턴에서 벗어나면 남자는 불안했다. 김 간호사가 이 간호사에게 오더를 내리지 않고 직접 링거를 교체하면 불안했고, 한 박사가 일곱 걸음을 한꺼번에 걷지 않고 멈춰서면 불안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와 최 순경이 대화를 하지 않으면 불안했고, 방문자가 있는데 실수로라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공포에 질렸다. 남자에게는 사람들의 소리와 패턴을 기억하는 것이 카피캣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p.15
“결국 수사팀도 아내의 실종사건을 살인사건으로 전환했어요. 실효는 없지만요. 카피캣이 그렇게 만든 거죠. 그래서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거고.” 수인은 한지수의 대답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는 몸 어딘가에서 스위치가 켜진 듯 열이 올랐고 몸이 저렸다.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해져 침대보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흥분이 밀려오는 중이었다. 본능적인 감각이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그가 알고 있는 연쇄살인마의 뒤를 다시 쫓기 시작했다는 추적의 감각. 수인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연쇄살인마를 쫓는 것이 자신을 찾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입가가 떨리는 걸 숨기느라 이를 꽉 물었다. --- p.42
수인은 오피스텔 건물의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보통의 오피스텔보다 넓었고, 복도의 구조가 복잡했다. 한 형사가 오피스텔 문을 열었다. 피 냄새가 묵은 공기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이정우의 정확한 사인은 다발성자창(날카로운 것에 찔려서 두 군데 이상 생긴 상처)에 의한 실혈사예요. 동맥이나 장기를 건드린 치명적인 상처는 없어요.” 수인은 한 형사가 이끄는 대로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보다 싸늘한 냉기에 몸이 움츠려들었다. 한 형사가 오피스텔의 불을 켰는지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빛이 섞여 들어왔다. 수인은 자신의 발자국이 현장을 훼손할까 봐 한 걸음 내딛는 데도 신경이 쓰였다.
과학수사의 현장을 잘 아는 작가가 쓴 장르소설이다. 작가는 사건현장의 진입부터 증거의 채취, 증거의 분석까지 소설 속에서 충실하게 현실을 재현해낸다. 범죄현장을 분석해 재구성하는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동료가 연상될 정도다. 과학수사 분야에서 한국 소설로는 보기 드물게 제대로 된 장르물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