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베이징대학교 캠퍼스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신입생은 모든 게 낯설었다. 고향에서 짊어지고 온 가방을 들고 입학 수속을 밟기엔 너무 버거웠다. 마침 길을 지나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이 있었다. 염치불구하고 가방을 잠시 맡겼다. 일 처리를 하다 보니 가방을 잊었다. 아뿔싸, 점심시간이 다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가방 생각이 났다. 급히 되돌아가 보니 노인은 땡볕 아래 아직도 가방을 지키고 있었다. 이튿날 입학식에 참석한 신입생은 깜짝 놀랐다. 그 노인이 학교 주석단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가. 지셴린季羨林 베이징대학교 부총장이었다.
이 이야기는 베이징대학교에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다. 빛바랜 중산복을 입고 한평생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지셴린 선생의 체취가 배어난다. ‘먹는 것을 가리지 않는다’ ‘빈둥거리지 않는다’ ‘수군거리지 않는다’라는 생활상의 ‘삼불三不’ 원칙만큼이나 소박했던 삶의 향기가 느껴진다.
지셴린 선생은 1911년 8월 6일, 산둥山東 성 칭핑(淸平, 지금의 린칭臨淸) 현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숙부에게 맡겨져 공부를 시작했다. 지난濟南에서 초, 중, 고를 나와 19세 때 칭화淸華대학교 서양문학과로 진학했다. 중국사회과학원 원장을 지낸 후챠오무胡喬木가 동창이다. 당대의 대역사학자 천인커陳寅恪로부터 ‘불경번역문학’을 수강한 것이 그의 인생항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 문화와 범문梵文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잠시 지난의 모교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1935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괴팅겐대학교에서 범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다시 되돌릴 수 없지만 영원히 소멸할 수 없는 영광의 상징인 고대문자를 연구하겠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당초 2년을 생각한 유학생활은 2차 세계대전으로 귀국길이 막히는 바람에 11년이 걸렸다.
1946년 중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천인커의 추천으로 베이징대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이후 베이징대학교에 동방어언문학과를 개설하고 학문에 정진하지만 문화혁명의 폭풍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폭력과 욕설에 시달렸던 참담한 문화혁명 시기의 생활을 그는 1992년에 쓴 『우붕잡억』(牛棚雜憶, ‘우붕’은 지식인을 가둔 임시 헛간을 말함)에 남겼다. “전례 없는 재앙을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후손이 교훈을 얻지 못할 것이며, 훗날 잔혹한 바보짓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문혁의 고초 속에서도 밤이면 번역작업에 매진해 인도 고대 서사시 ‘라마야나’ 280만 자를 번역했다.
그의 학문적 성취는 인도 고대언어 연구, 불교사 연구, 중국?-?인도 문화교류사 연구, 비교문학 연구, 동방문화 연구, 산문 창작 등 10여 개 분야를 아우른다. 이에 따라 그에게 붙는 호칭만도 고문자古文字학자, 역사학자, 사상가, 번역가 등 다양하다. 정통한 언어만도 12가지에 달한다. 그가 2009년 7월 11일 타계할 때까지 맡았던 직위도 중국과학원 원사, 중국사회과학원 남아연구소 소장 등 수십 개가 넘는다. 한국 사료에도 관심이 많아 1999년에는 주중 한국대사관 부설 한중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기도 했다. 10년 전 우연한 계기에 뵈었던 자리에서 “귀중한 한국 사료들이 중국 사료실에 방치되어 있어 안타깝다”던 선생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선생의 학문적 업적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선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고매한 인품이다. 선생은 “가장 어려울 때도 내 자신의 양지良知만큼은 지켰다”고 토로했다. 1989년 6.4 톈안먼사태 직후 많은 지식인들이 조사를 받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발뺌을 했다. 그러나 선생은 “우리는 6.4 문제를 계속 인식해야 한다”고 맞섰다. “거칠고 변화 많은 세상에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 걱정할 것이 없으리.” 도연명의 시구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선생이었다. 그런 선생에게 원자바오 총리는 2003년부터 다섯 차례나 병실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책과 붓을 놓지 않았던 선생은 그에게 씌워진 ‘국학대사國學大師’ ‘학계태두學界泰斗’ ‘국보國寶’라는 세 가지 모자를 벗겨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고 했던가. 선생을 떠올릴 때면 늘 함께 떠오르는 문구다.
유상철(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소장)
“일생동안 손에서 필을 놓지 않고 항상 참된 글로 독자들을 감동시켜오셨습니다. 당신의 산문은 그 자연스러움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흐르는 시냇물처럼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진실하며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이 녹아 있어 읽어도 읽어도 또 읽고 싶게 합니다. 『인생』은 개인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지식인들이 걸어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원자바오 총리
자아의식이 생긴 이후 인류는 늘 인생에 대해 사유해왔다. 인생에 대한 사유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질문하는 문제다. 따라서 동서고금을 통해 이론이 분분하여 일치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언제 인생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될까? 대부분 좌절을 당하거나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에 부딪칠 때, 혹은 풍상고초를 겪고 났을 때 인생에 대해 절실하게 돌아보게 된다.
『인생』은 지셴린이 20세기인 90년대 후반기부터 21세기 초에 걸쳐 쓴 인생에 관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가 망구望九의 나이에 인생에 대해 느끼고 깨달은 것들이다. 90을 바라보는 이 시기는 그의 모진 생애에서 아주 특별한 단계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은 지혜로운 장자壯者가 펼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오랜 세월 묵힌 미주米酒처럼 마음 깊이 스며들어 감동을 자아낸다.
90여 년의 기나긴 인생 여정과 다방면을 통섭하는 풍부한 식견은 그의 인생론을 가장 권위는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그의 인생론은 단순하고 통속적이며 진실하다. 인생철학 교과서에 나오는 어려운 개념이나 설교와 같이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대중의 언어로 짜인 점이 이 책이 출간 이후 계속해서 베스트셀러가 되게 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인생철학의 측면에서 보면 지셴린의 인생론은 특별히 심오하고 깊은 철학이 담겨 있지는 않다. 그래서 지셴린의 인생철학이 사람들에게 더욱 귀하고 유익한 것이다. 이 책은 비록 원로학자의 인생론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실용적인 지혜를 담고 있다. 그의 인생철학은 분명 인간세상의 온갖 관계를 다루고 사람들이 선善을 지향하게끔 이끌어주는 생활지침서다.
구베이커
최근 『인생』을 읽고 감명이 깊었다. 그는 선악의 문제에 대해서 “자기도 생존하고 다른 사람과 동식물도 생존하게 하는 것은 선이다. 자신의 생존만 신경 쓰고 고려하고 타인의 생존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내가 사람들에게 잘못하더라도 그들이 나에게 잘못해서는 안 된다?’?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악이다”라고 논한다.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떻게 처사를 해야 하는가? 지셴린은 우리에게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사람과 자연계의 관계, 가족관계를 포함한 인간관계, 자신의 사상과 감정 사이의 모순과 평행의 관계, 이 세 가지 관계를 잘 관리해야 생활이 유쾌하고 즐거울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인생살이가 고달프다”고 조언한다.
그의 이러한 성공적인 인생경험과 근사한 처세격언들은 사람들에게 힌트와 격려를 주며, 우리가 그것을 거울로 삼아 심사숙고하게끔 한다.
고우펑 (인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