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들이 모두 ‘완결된 페미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완성된 페미니스트일 수는 없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것은 성차별적인 이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따라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채로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자신을 완결 지음으로써 어떤 정박점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은 죽음의 충동이다. 더 이상 사유하지 않겠다는 의지, 더는 변화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스스로를 멈추게 만든다. --- p.15
속도의 페미니즘은 빠른 확산, 신속한 대응, 가벼운 행위를 가능케 하는 특징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한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빠른 속도는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메르스 갤러리, 메갈리아, 워마드, 다음 카페,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온라인상에 형성된 사이버 매트릭스는 페미니즘에 빠른 속도를 부여했지만, 그와 동시에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논의해왔던 폭넓고 입체적인 논의 내용들은 다소 평면화되는 문제를 낳았다. --- p.22
속도를 고려하는 정치학은 어떤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버리는 정치학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요소에 대한 고려와 타협, 설득과 협상이 필요한 정치학이다. 페미니즘의 통찰은 누구도 완벽한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우리는 부족하고, 부분적이고,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정동적인(감정적인) 존재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부분성과 부족함, 불완전성과 취약성을 사유하는 것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더 나은 정치의 가능성이다. --- p.48
페미니즘적 인식론은 나아가 피해의 고통과 그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만들어낸 구조적 원인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 기존에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던 이들까지도 포괄하는 연대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확장된 연대는 이 사회가 페미니즘을 상식적 규범이자 공용어로서 수용하게 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 p.72
상대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개인의 협소한 자아를 넘어서는 활동이다. 한 개인의 경험 세계는 그 자체로 풍부한 광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한적이다. 개인의 경험 세계를 넘어서고 자신의 경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경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는 곧 자신이 겪지 않은 또 다른 폭력의 경험을 직면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토대로 공감과 연대를 이뤄내는 과정이 된다. --- p.73
나는 적대적 진영 논리와 대비되는 새로운 공용어가 인간에 대한 품위와 존중의 언어여아 한다고 믿는다. 사람을 적군과 아군으로 구분하여 ‘우리 편’은 그 어떤 잘못도 용납될 수 있으나 ‘적’은 반드시 말살되어야 한다는 식의 사고는 차별과 혐오의 사고로 이어지기 쉽다. 이에 맞서는 대안적 언어라면, 그 어떤 인간도 있는 그대로 존중되어야 하며, 사람들이 가진 인간적 품위가 손상되어선 안 된다는 가치를 내포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 p.89
이렇듯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늘 당연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전제를 다시 한 번 뒤흔들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주장한다. 젠더 억압을 당사자성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왜곡이라고. 이 글에서는 안정된 재현 주체를 상정하는 당사자성과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고 배타적인 실천을 넘어선 정치적·윤리적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 p.100
이제 누가 젠더 억압의 당사자인가를 논하는 것은 과연 소모적이다. 우리가 소수자에 대한 억압을 비판하고 사회적 공론화를 요구할 수 있는 이유는 분리할 수 없는 수많은 정체성들이 가로지르는 어지러운 시공간 속에 배치되는 바로 그 지점에 개인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인권의 연결성과 다양성을 사유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트랜스젠더 해방도 여성해방도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다. --- p.101
‘여성’이라는 용어는 늘 가변적이고 모순적으로 성립되며, 누군가를 규정하는 완전한 의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대상을 재현하고자 할 때, “어떤 여성을 재현할 것인가?”라는 불안한 경합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배타적인 실천은 결국 ‘동일성의 폭력’이라는 또 다른 폭력에 가담하면서 더 심한 파편화를 불러일으킨다. --- p.115
정박된 ‘나’를 말하기를 포기하고, 어떤 ‘나’도 자신에게 속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무책임하지 않을 것이며,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다. 당사자성, 정체성을 벗어난 연대의 정치적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 p.120
독립한 후 내 자취방은 종종 번갈아가며 가출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도피처가 되었다. 가족을 ‘중재’하는 내 역할은 사실 그들을 내 방에 머무르게 했다가 다시 돌려보내는 것뿐이었다. 이제 나는 그들이 중재라 부르는 이 역할을 자처할수록 폭력을 끝내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 p.129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고통의 근원을 사유하며 피해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은 피해자의 고통에 침묵으로 일관한 채 그저 피해자의 몸만을 편안하게 해주는 행위와는 다르다. --- p.145
피해자가 겪는 고통 사이에서 심사숙고함으로써, 그가 자책이나 불안 속으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사유와 말. 또한 이는 피해와 가해의 경험을 구조 속에서 사유하게 만드는 말일 것이다. 그 말들은 연속적이고 복잡한 질문들과 함께 무엇이 문제인지 바로 가려내고, 젠더폭력의 문제점을 올바르게 정치화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폭력의 피해에 굴하지 않고 연대하고자 한다면 이 사유의 여정에서 마주치는 질문들과 직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 p.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