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자신과 마주한 후 이제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던 그녀는 딸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이게 뭐냐는 물음에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나 이제 엄마 안 해! 하숙집 아줌마 안 해. 여자 강순희. 아니, 그냥 사람 강순희로 살 거야.” 얼이 빠졌다가 깨어난 연화가 목청껏 자신을 불러댔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쩐지 분에 차 씩씩거리는 딸을 보니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순희 씨의 얼굴에 슬금슬금 미소가 걸렸다. ‘인생 육십부터라는데 난 이제 겨우 반백 살이다, 이거야! 엄마, 하숙집 아줌마 말고 강순희라 불러다오!’ 순희 씨는 그렇게 자신의 연화하숙 302호의 하숙생이 되었다. --- p. 24
“그러게 무슨 연애를 이렇게 요란법석하게 해?” 이불을 엄마 목까지 끌어 당겨주며 연화는 여전히 못마땅한 목소리를 냈다. “연애는 무슨. 산악회 모임이라고 말했잖아.” “웃겨! 내가 무슨 다섯 살이야? 그 말을 믿게. 뭐 열녀문이라도 세우시게?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게 진짜. 말본새 하고는. 쯧, 자식새끼 잘못 키웠어 진짜.” 순희 씨가 당황하며 들썩거리는 바람에 엄지발가락이 이불 밖으로 삐죽 튀어나오자 연화가 얼른 이불을 당겨 덮었다. “남자도 아닌데 그 시간에 미쳤다고 전화 한 통에 뛰어 나가? 비가 이렇게 퍼붓는데? 내 말이 틀려?” “야,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네가 연애하니까 뭐, 온 세상이 핑크빛이냐?” “거기서 멀쩡한 내 연애는 왜 걸고넘어져? 내 파릇파릇한 사랑을 그런 거무튀튀한 황혼의 불장난과 엮지 마시지?” --- p. 138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여성의 목소리는 다방면에서 갈수록 높아지고, 회사에서도 육아휴직을 내는 남자 동료들을 심심치 않게 봐 왔다. 그런데 어째서 엄마라는 단어만 저 쌍팔년도 진부하고 촌스러운 억지를 벗어나지 못하나 싶었다. 연화는 그런 신파가 싫었다. 적어도 자신과 엄마만큼은 저렇게 지지리 궁상 같은 신파는 아니라며 자신했다. 남들과는 다르다 자만했다. 나는 못 먹더라도 새끼는 먹이고, 나는 죽더라도 새끼는 살리는 건 곧 죽어도 연화 스타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매번 등짝으로 날아드는 엄마의 손이, 주책 좀 부리지 말라며 바락 대드는 두 사람이 더 현실감 있었다. 그렇게 다르다 자부했는데, 수술 후 힘겹게 겨우 내뱉은 말이 고작 밥 먹었냐는 엄마의 목소리에 연화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