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험주의 대신 변증법적 인식을, 개인주의 대신 공동체주의를, 민주주의의 대신 자치의 사회를, 욕망의 자유 대신에 진정한 자유, 자주성의 길을 내세우고 싶습니다.--- p.15
나도 역시 공동체의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실패만 거듭해온 공동체는 어떻게 하면 실현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오랫동안 나의 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p.87
‘나’와 ‘너’가 아닌 그 ‘사이’, 바로 이것이 공동체의 원리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가혹한 자본주의가 지배하더라도 공동체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런 공동체는 자본주의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오랫동안 살아남지 않을까요? 그게 내가 생각했던 공동체입니다.--- p.90
구조가 무차별하다는 생각에는 어떤 점에서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백인, 서양, 기독교, 남성, 어른이 보는 세계가 흑인, 동양, 비기독교, 여성, 아이가 보는 세계보다 올바르고 더 나은 세계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편견을 깨는데 이런 구조주의적 무차별성이라는 개념이 도움이 됩니다. 철학자 데리다는 이런 구조주의의 무차별성이 라는 개념을 가지고 백인 중심주의, 서양 중심주의, 기독교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 어른 중심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데리다는 이런 중심주의가 근대 계몽주의의 특징이라고 보면서 계몽주의를 비난했지요.--- p.99
그러므로 양시론이나 양비론, 인신공격의 오류를 비판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사물 속에서 경중, 가치, 연관성(수단과 목적, 원인과 결과 등)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런 구분을 위해서는 구조의 상대성을 극복하는 객관성의 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철학적으로 구조주의를 넘어서야 할 필요성이 여기서 제시되죠--- p.101
일단 구조주의를 비판하는데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는 것을 말해야겠군요. 그 가운데 하나의 길이 ‘직관주의의 길’이며, 다른 하나가 ‘변증법의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p.104
나는 변증법의 길이 불교적으로는 해탈의 길이라 말합니다.--- p.112
165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처럼 도구적 가치가 본래적 가치가 되고, 본래적 가치가 도구적 가치가 되는 역설이 일어납니다. 나는 이런 사회에서 실용주의는 아무리 겉으로 멋지게 포장하더라도 이것은 변태적 실용주의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반면 진정한 실용주의란 본래적 가치를 본래적 가치라 하고, 도구적 가치를 도구적 가치라 하는 것,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
현실 속에서는 합리적으로 살아라. 다만 사랑이라는 꿈만은 너에게 허용하겠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소설, 영화, 음악, 미술 등이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랑을 노래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면서 자기를 정당화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란 무늬만의 자유이며, 욕망의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p.209
무정부주의는 아름다운 합리적 공동체 이론입니다만, 정체와 분열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 p.263
--- p.269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학자들이 여러 대안을 제시했지만 사회주의를 제외하고는 대안이라 할 것은 없지 않는가? 최근의 많은 지식인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무정부주의는 초기 자본주의 또는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개선에 불과할 것이다. 결국 사회주의가 문제이다.
어쩌면 홍대 클럽문화 속에도 노동과 유희, 사랑이 하나가 되는 사회에 대한 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것이 지금은 선정적인 것이고 치정적인 것으로 표현되더라도 언젠가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동력으로 발전하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p.324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는 그 기본 개념인 쾌락의 자유라는 개념 속에 있습니다. 자유는 어떤 제한도 없다는 것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근본 개념이죠. 이런 입장에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자유를 제한할 객관적인 진리나 사회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진정한 자유에 도달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이 도달한 것은 공허한 자유였죠. 그 자유는 형식적인 자유에 불과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이 자유를 지배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건 욕망과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게 부시의 이라크 침공과 한국에서의 종북몰이의 실상이었습니다.--- p.334
들뢰즈의 미시적 생명력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생명력은 노동이 유희와 일치할 가능성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자발성만이 강조되면서 사회적인 상호 협력의 가능성이 충분하게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 p.345
들뢰즈와 라캉의 생각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보완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공동체의 가능성을 알려줍니다. 그의 타자적인 욕망 개념에 기초한다면 사랑의 공동체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자발성을 전적으로 간과하는 것이죠. 거꾸로 들뢰즈의 미시적 생명력 개념에 기초한다면 자발적 의지의 가능성, 스스로 쾌감을 느끼는 의지의 가능성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자발적 의지가 타인에 대한 악령이 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습니다.--- p.353
나는 이런 점에서 동학사상이야말로 서구 철학이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에 이미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철학이 추구하는 과제인 자발성과 공동체적 선이 동학사상에 이미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363
들뢰즈와 라캉의 사상을 종합하는 길은 없는가 하고요. 노동이 쾌감을 주고 동시에 사랑이 되는 그런 사회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p.353
이처럼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의 의지를 나는 자주적 의지라고 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나에게 지렛대의 받침점만 주면 지구를 들어 올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자주성이 가능하다면 역사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봅니다.--- p.369
찬바람이 맴도는 쓸쓸한 겨울, 그 한가운데서 여전히 생명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노자는 ‘곡신불사’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나는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는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p.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