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가 야외에서 자연을 직접 묘사하는 데 몰두한 것은 인상주의 발전에서 마네의 도회적 영감에 이어 제2의 길을 이루었다.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영국해협 연안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성장했고, 미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대도시에서 상당히 떨어진 노르망디 해변에서 형성되었다. 모네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도시의 화가들보다 단선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가 풍경화에 전념한 것은 인물화가 누리고 있는 권위-마네와 보들레르에게 있어 인물화는 현대성을 묘사하는 주요 수단이었다-에 대한 저항이었다. 화가로서 모네의 초기 활동은 노르망디 해변에서 체득한 그림에 대한 생각과 파리에서 마주친 실제 관행을 통합하겠다는 결심을 보여준다.
자연을 직접 그리는 일은 일찍부터 모네의 자기 인식에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실에서 작업할 때가 많아졌지만, 야외 현장에서 그린다는 신화를 유지하는 것이 그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 졌다. 여행과 화실용 보트를 비롯한 여러 전략은 그의 그림이 지닌 외양과 결합하여 '플랭 에르(plein-air)'회화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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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가 현대성의 표현을 이야기하면서 그 담당자로서 화가-'현대 생활의 화가'를 예로 든 것은 시각-나아가서는 시각 예술-이 무엇보다 우위에 있다는 그의 믿음을 강조해준다. 눈은 '나'-자아-의 중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뇌르(flaneur)'의 예리한 통찰력은 개체로서의 존재가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개인의 특징을 재확인해주었다. 게다가 도시 생활의 분주함은 시각 이외의 접촉 방식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타인의 생활을 추측하는 일은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모험이 되기도 했다.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중엽의 프랑스에서 사회적, 경제적 유형을 해설한-더구나 삽화를 곁들인-책들이 쏟아져 나온 데에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초기에 나온 가장 광범위한 해설서 가운데 <프랑스인의 자화상>(1839~42)은 잡화상 주인에서부터 넝마주이까지, 길거리에서 뛰노는 개구쟁이에서부터 지주에 이르기까지, 상점 여점원에서부터 상루층 귀부인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도덕적 관상학적 파노라마'를 제공했다. 오늘날에도 대도시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가운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다양한 사람들의 신분이나 성격을 짐작해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현대 생활의 화가는 "계층과 혈통의 차이를 한눈에 분명히 알아볼 수 있도록" 표현함으로써 이런 유형학적 솜씨를 발휘한다고 보들레르는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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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검토해볼 기회를 인상주의만큼 많이 제공하는 예술운동도 드물다. 통틀어 여덟 번 열린 인상파전에 한 번 이상 출품한 60명 가까운 화가들 중에는 저명한 여성이 세 사람 끼어 있었다. 처음부터 참여한 베르트 모리조, 프랑스에 귀화한 미국인으로 드가의 친구였던 메리 커셋, 동판화가인 펠릭스 오귀스트 조제프 브라크몽의 아내인 마리 키브롱 브라크몽이 그들이다. (중략) 여성은 자주 인상주의 회화의 소재가 되었고, 초상화, 풍경화 실내화보다 서사성이 더 중요했던 초기에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인상주의 회화는 현대성에 대한 객관적 묘사를 가장하여 여성들에게 사회적으로 부여된 역할을 정당화하는데 참여했다. 게다가 인상주의의 여러 측면들, 특히 색채에 기초를 두는 원리는 여성성과 결부되었다. 샤를 블랑은 『디자인 예술의 원리』(1867)에서, 전통적으로 데생은 남성성과 결부되고 색채는 여성성과 결부된다는 말을 몇번이고 되풀이했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데생이 색채를 지배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게다가 인상주의 회화를 서술하는데 사용된 언어는 섬세함, 자연스러움, 매력 등 여성과 결부된 용어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외양을 강조하고 시각적 감각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 것도 같은 성적 테두리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은 주로 여성에게 적합한 것으로 치부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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