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가 위대한 시인이라는 건 많이들 알지만, 정작 그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다. 단테의 걸작 『신곡Divine Comedy』은 하나의 모험담이다. 신비로운 저승세계로 여행을 떠나 지옥, 연옥, 천국을 거쳐 마지막에 신을 직접 대면하기까지의 순례 과정을 소개한다. 넓게 보면 『신곡』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문제들을 두루 다룬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삶에서, 또는 죽음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이런 테마들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독특하게 생기 넘치고 생생한 언어로 탐색된다. --- p.11
『신곡』을 소개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정통적이지 않다. 나는 단테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이나 저승의 세 영역으로의 여행 과정을 요약하거나 개괄하지 않는다. 그렇게 설명하면, 특히 이 시를 처음 접하는 독자는 세부 내용에 질린 나머지 이 작품의 중심 사상에 담긴 힘을 깨닫기 힘들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각 장을 테마를 중심으로 구성했으며, 중요한 에피소드 위주로 설명했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한 에피소드에서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기보다는, 전체 이야기에 흩어진 만남들과 장면들을 연결하여 그 연관성을 보여주려 했다. --- p.13
내가 아는 작가 두 명에게 단테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교양 인문학자이기도 했던 그 두 사람은 거의 한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번거롭게 왜 읽어요? 이 책에서 나는 번거롭더라도 꼭 단테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싶다. 19세기 혁명 사상이 대중 의식 속에 스며들어 전통의 종교적 사고방식에 도전하기 시작하던 시기의 한 이탈리아 시인[시인이자 문학사가인 조수에 카르두치(Giosue Carducci, 1835~1907)를 가리킨다. 190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옮긴이]은 단테에 관한 소네트를 쓰면서, 마지막 행의 간결한 경구로 요점을 표현했다. 설사 신은 죽었다 해도, 위대한 예술은 살아남는다고. --- p.18~19
문학의 위대한 테마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 욕망, 시간, 기억. 복수, 용서, 속죄. 사랑과 미움, 충성과 배신. 파괴성과 자멸. 추방과 귀향. 다양한 인간들과 지략, 인간적 번영에 필요한 조건들. 인간의 나약함, 인간이 스스로를 속이고 자기 삶을 이야기하면서 왜곡된 인식을 투사하는 방법들. 돈과 권력, 그것에 대한 집착이 개인적인 삶과 사회 구조에 끼치는 해로운 효과. 전쟁과 평화, 세계가 최고의 질서를 누릴 방법. 지적 야망과 지식에 대한 갈망. 예술가가 자신의 매체와 벌이는 싸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이야기 구조 속에 구현되어 있다. 그 이야기의 구체적인 세부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암시적이지만, 인간 행위에 대한 통찰과 인간 행복에 대한 관심은 보편적이다. --- p.42~43
그의 정치적 헌신은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지역에 상관없이 인류 번영의 필요조건을 묻는 근본적인 질문과 맞물리게 된다. 나아가 그는 백과사전적 포부를 담은, 거의 상상을 초월한 야심 찬 시를 구상하게 된다. 고향 피렌체 토착어를 사용해 온갖 다채로운 언어 사용역(使用域)을 구사하며 위대한 고전 서사시들에 견줄 만한 걸작이 될 시를. 그리고 단테 자신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임을 증명하게 될 시를. --- p.97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예이츠를 추모하는 시를 썼던 W. H. 오든은 “시는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단테는 시가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기를 바랐다. 현대 세계의 공포와 마주한 그 시인의 무기력과 위기감 같은 우리의 현대적 감정이 단테에게는 없었다. 『신곡』에서 시란 정확히 세계 변화를 위한 것이다. 그 시인은 이렇게 쓴다―글쓰기를 위한 그 여행 도중 베아트리체에게 그렇게 가르침을 받는다―“나쁘게 사는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in pro del mondo che mal vive).” --- p.100
단테는 늘 그랬듯이 “참여적” 정치 작가다. 그와 견줄 만한 현대 작가로는 스탈린 치하에서 거리낌없는 발언으로 유배를 당했던 러시아 작가 오시프 만델스탐(Osip Mandelstam)이 있다. 단테는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을 위한 더 나은 세계를 원했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탐욕과 부패 때문에, 무자비하게 개인적 야망을 좇는 자들의 끊임없는 전쟁과 내전 때문에 비참하게 살았다. 세계의 안타까운 상황을 초래한 자들―적나라한 이기심과 탐욕으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종교적, 세속적 지도자들―을 향해 일갈하는 단테의 외침은 역사상 쓰였던 여느 정치적 선언문만큼이나 우렁차다. 그 밑에 깔린 열망은 언제나 명쾌하다. 인류가 생산적이고 보람 있는 삶을 살게 해줄 평화, 그리고 부정한 행위를 한 사람이 처벌받는 정의. --- p.132
그러나 단테는 책상머리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의 견해는 현실정치에서 직접 얻은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초반에 앞날이 창창해 보이던 그의 정치 경력은 처참하게 틀어져버렸다. 그는 삶의 마지막 20년 동안 망명지를 떠돌면서 통치자들의 궁정에서 비서나 대사로 일하며 사람들의 호의와 자선으로 먹고살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전망을 가장 잘 보여주고 그 열정적 이상주의의 옹골찬 힘을 표현해주는 것은 시다. 『신곡』은 설교가 아니듯 정치 소책자도 아니다. 단테가 잘못된 세계에 자기 전망을 투사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끌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힘, 바로 말의 힘 때문이었다. 중세 역사를 잘 모르는 독자도 그가 꿈꾸는 전망의 힘을 가늠할 수 있다(실제로 그 시를 읽을 때는 전혀 몰라도 된다). 그가 그리는 상상이나 그 언어의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 --- p.133
정치권력은 덧없이 사라지지만, 예술은 지속된다. 시인이 교황을 이긴다. 얼마 전 뉴욕에서 택시를 타고 링컨 센터를 지나다가 맞은편 작은 공원의 나무들에 반쯤 가려진 이상하게 친숙한 어떤 모습을 얼핏 보고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20세기 초반에 예술의 힘에 경의를 표하면서 세운, 등신대보다 큰 단테의 청동상이었다. 말로 쓰인 최고의 형식, 시의 힘은 인간 운명을 반영하고 영원히 남긴다. 보니파키우스의 조각상은 일부 골동품 연구가에게만 관심을 받으며 박물관 안에서 시들어가지만, 한 손에 책을 든 시인은 우뚝 서서 신세계와 새천년에 자신 있게 말을 걸고 있다. --- p.138~139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는 단테 자신의 시적, 감정적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두 인물이다. 한 사람은 문학적 열정을 대표하며, 또 한 사람은 실제 관계가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다. 저승세계의 안내자로 이 두 사람을 선택한 것은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자서전과 알레고리를 연결 짓는다. 단테는 하나의 중세적 장르를 재발명하고 또 초월한다. 부분적으로는 『아이네이스』에서 아이네이아스가 지하세계를 방문한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성서 이야기와 그것이 의미하는 방식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서 단테는 모든 면에서 고대의 위대한 고전 서사시에 필적할 만한 시를 창조했다.
---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