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삶이란 과연 그렇게 명료하게 정리되거나 요약될 수 있는 것일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기준이 그리도 선명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한 세기의 역사와 문학이란게 그렇게 연표나 한 장의 명단으로 뽑혀져나올 수 있는 것일까. 그 화려한 연표나 명단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일과 고통, 애환, 신념들이야말로 시간 속에 갇혀 있으면서 그 시간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주인들이 아닌가.(160p)
--- p.160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말은 시대를 벗어던지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탕진시키기 전에 스스로를 온전히 불태우라는 권유였다는 것을.(고 김남주시인의 말씀을 반추하며....
--- p.172
소가 자기도 모르게 내는 울음소리가 시라면, 산문은 삶이라는 뻣센 지푸라기를 씹고 또 씹는 되새김질 같은 거라고 생각해왔다. 산문이 시보다 좀더 의식적이고 반성적이 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데 지나간 글들을 정리하면서 보니 제대로 새기지도 않고 삼킨 지푸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꾸만 고개를 디밀고 올라왔다. 대체 기억이란 얼마나 되새겨야 흙으로 돌아가며, 상처란 얼마나 고개 숙여야 순해지는 것일까. 시인이 산문집을 묶는다는 것이 스스로의 헐벗음을 드러내는 일이 되기 쉽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시를 쓸 때도 언어 뒤로 숨는 데 그리 능하지 못한 내가 산문에서는 더더욱 살아온 모양새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노릇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들이 내 속에서 시라는 바퀴를 나아가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멈추게도 하면서 함께 굴러온 또하나의 바퀴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이쯤에서 내려놓는다. 두 바퀴가 삐걱거리며 지나온 길을 되짚어 걸어가는 마음으로 글들을 조금씩 손보았다.
『반 통의 물』이라는 제목부터가 그런 삐걱거림에 대한 고백인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사람은 반쯤 담겨진 그릇의 물과 같고 지혜로운 사람은 가득 찬 연못의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비추어 보아도 나는 역시 반 통의 물에 가깝다. 스스로 충만해서 일렁임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 것이고, 반쯤 모자라 출렁거리고 사는 어리석음이 나는 그다지 싫지 않다. 지금까지 글을 써온 것도 내 속에 채워지지 못한, 또는 잃어버린 절반으로 하여 뒤척인 날들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책 속에는 讀幸寓은 있지만 都遊莪寓은 없고 獨彭5寓은 있지만 牘막永寓은 없다. 그 대신 나를 지나간, 또는 내가 지나온 道すサ寓과 犢泳宕寓이 있다. 고단한 삶 속에 혼자 내던져진 것 같았던 날들도 실은 그들이 베푸는 그늘 아래 있었음을 이제야 느낀다. 그 나무들과 사람들에게 이 모자란 책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낯선 손님은 온다는데 마땅한 찬이 없어 자꾸 찬장문만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사람처럼 허둥거리다가 간신히 상을 차리긴 차렸다. 이 빈약한 밥상을 받아드는 이여. 찬이 없으면 온기나 허기를 찬으로 삼아 먹는다고 했으니, 다행히 그대 영혼의 허기를 만나 조금의 온기나마 나눌 수 있기를.
--- 책머리에서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검은 머리칼이 있던, 빗을 썼던 그 까마득한 시절을 더듬고 있는 그 분의 눈빛을. 이십년 또는 삼십년, 마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떼처럼 참으로 오랜 시간이 그 눈빛 위로 스쳐지나가는 듯했다.'(노 비구스님에게 실수로 빗이 있냐는 물음을 하고 나서 ...
--- p.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