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50페이지에 걸쳐 기독교의 근간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서술되고 있다. …나는 이 교리를 부정한다. …내가 나의 이성적인 영혼의 의식과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부정하는 셈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모순되고, 성경에서도 전승에서도 어떤 근거를 갖지 않는 이 교리를 부정하고 나서도 내게는 여전히 교회로 하여금 이 무의미한 교리를 고백하게 하고 그렇게도 열심히 날조한 증거들을 수집하게끔 하는 구실이 설명되지 않는 채 남는다. 이것이 내게 더 놀라운 것은 여기에 서술된 이 끔찍하고 모독적인 교리가 명백하게 누구에게도 무엇을 위해서도 필요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 p.165~166
나는 특히 그리스도를 열렬히 믿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신학적인 논의를 위한 것 말고는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정교 신앙인이었을 때 성령에 대한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 적이 없다. 신앙과 삼위일체의 정의를 나는 학교에서만 발견했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둔하며, 어떤 근거도 없으며,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도 교회는 그것을 고백한다. 무엇을 위해서 교회가 그렇게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서술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 p.169
내가 하나님에 대한 의심할 여지없는 지식에 이르게 된 것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였다. 내가 내 영혼의 지식에 이르게 된 것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였다. 내가 가장 단순한 질문들을 하는 길을 통해서 지식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의심할 바 없이 수의 무한성과 하나님, 그리고 나의 영혼을 안다.…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할머니에게서, 할머니는 증조할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럼 가장 마지막 할머니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는가?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에게 이르게 된다. 손톱은 내가 아니다. 손도 내가 아니다. 머리도, 감정도, 심지어 생각도 내가 아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나다. 나는 나의 영혼이다. 그러나 내게 무한한 수가 첫 번째라거나 혹은 첫 번째가 아니라거나, 짝수라거나 혹은 짝수가 아니라고 말할 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무한성에 대한 나의 개념을 거부하게 된다. 내게 하나님과 그의 존재, 속성, 위격에 대해 말할 때도 나는 똑같은 것을 체험한다. 나는 이미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믿지 않는다. --- p.191~192
신학은 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구속(救贖)의 교리와 연결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질투심이 많고 악한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가르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 그런 생각만이 이 장을 이해하는 어떤 열쇠를 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왜 필요한지 모른다면 무엇을 위해 가장 단순하고 순진한 이야기를 재해석하고 왜곡시켜서(완전히 텍스트에서 벗어나서) 그것에서 모순되고 부조리한 해석을 만들어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진실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무엇인가? --- p.207
교회는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악과 죽음에서 구속(救贖)했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가 사람들을 악과 죽음에서 구속했다면, 사람들의 악과 죽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발생한다. 그래서 타락의 교리가 고안된 것이다. 하나님인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악과 죽음에서 구원했다. 사람들은 본질상 선한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악과 죽음이 사람들에게 올 수 있었는가? 이 문제에 타락의 신화가 답한다. …인류가 만약 구속을 믿는다면, 이 상상된 구속의 상태에서 인류는 이미 죄와 고난, 노동과 죽음에서 해방된다. 교회는 이것을 가르치는데 여기에 구속과 그것에 기초한 타락을 꾸며낸 이유가 있다. --- p. 254
내가 하나님의 목적과 수단, 생각,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그가 삼위일체라면, 만약 그가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만약 그가 나를 구속했다면, 그것은 내게 좋은 것이다. 계획과 구속,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나 내게는 나의 일이 있다. …하나님이 한 일을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나는 다만 내 일을 해야 한다. 내게는 나의 일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런데 신학에서 내가 항상 보는 것은 나의 일이 점점 축소되고 구속의 교리에서는 심지어 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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