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란 용어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다.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이 설립되면서 새 나라의 사람들을 호칭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일보』에는 ‘한국 사람’이란 표현이 1962년 9월 22일 기사에 처음 나타난다. ‘한국 사람’은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새로운 인간형이다. --- p. 8~9
19세기 말까지도 ‘조선 반도’로 불리던 땅에 살던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었다. ‘조선 사람’은 14세기 말~15세기 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朝鮮, 1392~1910)의 건국 세력은 불교 국가였던 고려를 멸망시키고 고려인들에게는 생소하고 이질적이기만 한 주자성리학이란 이념을 도입하여 새 문명을 건설한다. 조선 왕조가 강력하게 추진한 개혁의 결과, 16세기 말에 이르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움의 근간으로 삼아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윤리관을 내재화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조선 사람’이 완성된다. --- p. 9
조선 사람의 정체성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나선 조선 사람들은 다섯 가지 대안을 찾는다. 첫째, ‘친중위정척사파’, 둘째, ‘친일개화파’, 셋째, ’친미기독교파’, 넷째, ‘친소공산주의파’, 다섯째, ‘인종적 민족주의파’다. --- p. 11
우리는 조선 사람이 한국 사람의 ‘원형’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 사람 역시 조선조의 개혁 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형이다. 고려 사람은 조선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고려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서 사는 풍습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려 남자들은 처가살이를 하였다. 또 대부분의 고려 사람들은 외가에서 나서 자랐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성행하였다. --- p. 40
조선 말의 위정척사 사상은 흔히 화서 이항로와 면암 최익현의 학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의 기원은 병자호란(1636~1637)을 겪으면서 형성된 후기 조선의 친명반청(親明反淸) 이념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p. 132
그토록 의지했던 명이 사라지고 ‘오랑캐’가 대륙을 차지한 천붕지해의 시대에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국제 정치적, 사상적 정체성을 재정립해야만 했다. 명이 사라진 후 조선의 체제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적성국가(敵性國家)인 청이 대륙을 차지한 상황에서 어떤 외교와 안보 정책을 채택할 것인지, 문명의 척도였던 주자성리학이 중원에서 사라진 후 무엇을 문명의 기준으로 할 것인지,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재검토하고 재설정해야 했다. 송시열의 「기축 봉사」,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론’, 그리고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대에 조선을 뒤흔든 ‘예송’(禮訟), ‘사문난적’(斯文亂賊) 논쟁 등이 그 결과였다. --- p. 133
이처럼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사문난적’인 천주교의 도전과 대외적으로는 ‘서양 오랑캐’의 출현으로 빚어진 위기에 맞서 일어난 것이 위정척사파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형성된 소중화 사상과 쇄국 정책은 서세동점과 개국의 시대를 맞아 다시 한 번 만개한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원-명, 명-청 교체기에 버금가는 또 한 번의 난세로 빠져들고 있었다. 세계 문명의 축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동아시아의 문명과 무력의 축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고 있었다. 명-청 교체기에 형성된 친중위정척사 사상과 쇄국 정책으로는 넘을 수 없는 파고(波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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