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불행하지는 않아. 세상에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지. 하지만, 행복이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 내 손은 텅 비어 있다. 누구든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면 자는 생활을 몇 년이나 되풀이한다면 견디기 어렵겠지?'
쉰 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데, 어떻게 이렇듯 생각하고 있는 것이 똑같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일이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초조감, 자신 없음, 세상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소멸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런 자포자기한 구석이 닮았다고 미나는 생각했다.
'뭐, 해보고 싶은 일 없어요?'
미나는 겐이치로를 쳐다보는 대신 쑥갓과 송이버섯 무침을 응시하였다.
--- p.152
슌은 쿵쿵거리며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심장 소리가 급기야 밖으로 튀어나와 여자의 귀에 들리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이따금 겁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유지와 나머지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비닐 수지처럼 끈적거리는 침이 이빨 사이에 뒤엉켜 혀를 옭아매고 있었다.
간격을 좁히기에는 아직 빠르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그때부터다. 슌은 땅을 보지 않고 여자만 본 탓에 돌부리에 뭔지에 걸려 한두 번 휘청거렸지만, 여자는 어둠 속을 걷고 있다는 불안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불과 4, 5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육체. 여자의 몸은 10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을 받자, 한낮의 햇살을 받은 것보다 더 빛나 보였다. 빛의 고리에서 빠져 나왔는데도 빛은 곰팡이처럼 여자의 옷에 들러붙어 떠나려 하지 않았다. 여자의 몸에 번갈아 닿는 빛과 어둠, 소년들은 공포와 불안에서 서서히 해방되어, 어색하게 느껴지는 팔과 다리, 몸의 마디마디가 기분 좋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이미 아주 친밀한 사이야.
슌은 집요하게 뇌리에 떠오르는, 쾌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아미와의 기억을 떨쳐버리려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 쥐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여자와의 거리가 좁아진다. 빛이 닿지 않는 장소에서, 여자의 몸은 새카만 살덩어리로 보인다.
--- p.239
'벌써 열두시로군'
겐이치로는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불끄려냐?'하고 묻고는 스텐드 불만 남기고 침대에 누웠다. 한밤에 호수 위에 띄운 보트처럼 하얗게 떠오른 침대 속에서, 둘은 각기 다른 나룻배를 타고 흘러가는 듯한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섹스 해도 괜찮아요'
미나의 목소리가 날개처럼 겐이치로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고양이를 기른 적이 있다. 잘 때 가슴으로 폴짝 뛰어올라온 고양이가 얼굴을 비벼댈 때마다. 겐이치로는 늘 뿌리쳤다. 무엇이든 일방적인 것은 질색이다, 놀린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듣지 못한 것으로 하고 자버릴까 하다가, 미나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안 될 거야'
--- p.153-154
눈을 감고, 벤치에 등과 머리를 기댔다. 겐이치로는 눈두덩의 엷은 막 너머로 태양을 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빨간 반점이 퍼지면서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은 눈 위로 눈물이 흘러 넘치는 것을 느끼고,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오열을 들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자신의 감정으로부터도 배제당한 겐이치로는 이 세상과 자기를 잇는 마지막 문의 손잡이가 없어졌음을 느꼈다.
빛은 공원을 줌 아웃하듯, 겐이치로를 남겨두고 거리로 퍼져 나갔다.
--- p.160
겐이치로는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견디는 것이 삶이라고 말해주고픈 충동애 사로잡혔지만 그러나 그녀들도 이미 알고있을 것이다. 누군가를,무언가를 갈망한다느 것, 그것이 젊음이다.
--- p.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