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1990년 《한길문학》에 <청어는 가시가 많아> 등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등이 있으며, 2005년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다.
넘실거리는 어두운 바다를 덮고 있는 흰 거품들, 저 먼 쪽빛 봄 바다는 더없이 평화로운데 시선을 바로 아래로 두면 아우성이다. 봄의 바다조차 들끓고 있는, 다스릴 수 없는 내면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꽃잎 한 장에서 괴로움을 읽어내는 것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을 덮고 있는 것은 흰빛이다. 저 반짝이는 흰빛 아래 얼마나 커다란 어둠이 웅크리고 있는가. 세상을 덮고 있는 것은 밝음이지만 그 밝음을 한 겹만 벗겨 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버티고 있다. 바다는 저 밝은 푸른빛 아래 널름거리는 어두운 혓바닥을 수없이 감추고 있는 것이다. 깊고 어두운 내면을 완벽하게 덮어 버리고 있는 흰빛의 밝음이 이 세상의 비밀 아닌 비밀인 것일까.
--- pp.19~20
배가 동굴 쪽으로 천천히 들어가 멈추어 있을 때 물 밑을 보자 멸치 떼가 은빛으로 일렁였다. 멸치가 이렇게도 아름다울 줄이야. 멸치가 물 밑에서 뿜어내는 은빛이 수면에서 햇살과 만나 눈이 시리고 부셨다. 어디서 맑은 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 몸이 그 눈부신 풍경을 받아 울리는 소리였다. 바다가 연주하는 교향악을 눈으로, 살갗으로, 냄새로 들으며 섬의 풍경을 돌아보았다. 바위에 붙은 따개비와 수초와 반짝이는 멸치들이 삶을 너무나 생생하게 되돌려 놓았다. 내일 나는 이 섬을 떠난다.
--- p.76
꽃 다 지고 초록이 높아간다. 영산홍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5월이다. 오동나무 아래를 가슴을 움켜쥐고 가만히 지나가야 하는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