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1902~1934. 시인의 본명은 김정식이지만 어릴 때 살던 곳의 뒷산인 소산에 뜨는 달을 좋아해서 얻은 아호 “소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나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산고등학교에서 수학하다가 그곳에서 그의 평생의 스승인 김 억을 만났다.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낭인의 봄」, 「야의 우적」, 「그리워」 등를 발표한 것이 글을 쓰는 그의 삶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3.1. 운동의 여파로 다니던 오산 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 후부터 [개벽]을 중심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제비」, 「강촌」 등이 이 시기에 쓰였으며,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가는 길」, [배재] 2호에 실린 「접동」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졸업 후에는 다시 일본 도쿄 상과대학에 진학했지만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중퇴하고 귀국했으며, 귀국 후에 서울에서 문인 나도향을 만나 함께 동인으로 활동하며 친분을 쌓기도 했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와 조부가 운영하시던 광산 일을 돕다가 사업이 실패하자, 처가가 있는 곳에서 동아일보 구성지국을 경영하게 되었으나 그것도 순조롭지 않았다.
사업의 거듭된 실패는 그를 경제적, 심리적으로 심하게 압박했고, 삶에 대한 무력감으로 1930년대에 들어서는 작품 활동도 저조해졌다. 그는 결국 14세에 만나 결혼한 아내 홍단실과 자녀들을 남겨두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개벽]에 시론 「시혼」을 발표한 것이 절정이었다. 첫 시집이자 생전의 유일한 출간물이 된 [진달래꽃]에는 여성적 화자를 통해 이야기하던 그의 전반기 작품의 경향이 잘 드러나 있다.
민족적인 정서를 민요조의 운율에 맞춰 노래하던 그는 꽃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생의 순환적 원리에 순응하는 고찰을 깊이 있게 풀어냄으로써 시대와 사조에 상관없이 사랑받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