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마음을 둥근 컵에 담아봅시다] 『아홉 살 마음 사전』 박성우 시인이 펴낸, 몸은 컸지만 마음은 그대로인 이 세상 ‘어른이’들을 위한 동화. 숲에 벼려진 머그컵 커커는 동식물들과 마주치며 저마다의 쉬어감에 대해 말한다. 살아가며 이리저리 모서리진 마음을 둥글게 보듬는, 작은 컵의 커다란 위로. - 소설 MD 이주은
이 반절의 하트 사이에 검지와 중지를 넣고 손잡이 윗부분에 엄지를 얹어 살짝 들어 올리면 가뿐하게 올려질 컵.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가볍게 적시며 안에 품고 있는 걸 아낌없이 내어주었을 컵. 하지만 지금은 그저 강가 풀숲에 놓여 있는 컵. 어떤 즐거운 걸음을 따라 나왔다가 혼자 남겨지게 된 컵. 자신을 깜빡 두고 멀어져갔을 발소리를 까막까막 들었을 컵. (중략) 커커는 문득 뭉게구름을 둥실, 담아본다. 연한 햇살과 연둣빛 풀 냄새를 남실남실, 채워본다. 강바람 소리를 둥글게 굴려보고 강물 소리를 동그랗게 품어본다. 이 기분 이 느낌은 뭘까? 물이나 커피같이 일상적인 것만 담아왔을 컵. 그대가 사랑하는 이의 입술보다도 그대의 입술에 더 많이 닿았을 컵. 컵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 「프롤로그, 갑자기 낯선 곳에 혼자」 중에서
“너는 어떻게 이렇게 꽃향기를 가득 담고 있을 수 있지?” “응, 뭔가를 담는 게 내 일이거든.” 커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한다. 하지만 실은 얼마 전부터 부지런히 컵 안 가득 장다리꽃 향기를 모았다. 내가 컵이 아니고 양동이면 좋겠어, 장다리꽃에서 뚝뚝 떨어지는 꽃향기를 아까워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장다리꽃 냄새를 지금 담아두지 않으면 언제 사라질지도 몰라 허투루 할 수 없기도 했다. “음, 그런데 말이야. 넌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향기를 가져와 담을 수 있지?” 은근한 호기심이 생긴 나나가 더듬이로 물음표를 그려 보이며 물었다. “음, 그거는 간단해. 향기 있는 곳에 내가 있기 때문이지!” --- 「마음도 날개처럼 딱」 중에서
외로움에 익숙해져 외롭지 않은지도 모르고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거미는 어제도 혼자였고 오늘도 혼자지만 아무렇지 않다. 어제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오늘도 특별한 일 하나 없이 저물고 있지만 괜찮은 하루라고 여긴다. 들떠서 출렁여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지만 그건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거미는 그저 거미답게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유쾌하게 쓸쓸한 시간을 즐길 뿐이다. 거미는 내일도 거미줄에 걸린 아침 이슬이 햇살에 반짝이는 걸 보는 일로 아침나절을 보낼 것이고 거미줄 사이를 지나던 바람이 잠시 거미줄에 걸려 흔들리다 가는 걸 보는 일로 오후를 보낼 것이다. 헐거워진 집을 수리한 보람도 없이 저녁을 맞이할지도 모르고 거미줄 한 가닥을 당겨 한 줄기 달빛이나 싱겁게 튕겨보는 일로 깊은 밤을 건너야 할지 모른다. 먹고사는 일이란 원래 고만고만하게 쓸쓸한 것이라 여기면서. --- 「외로워 외로워」 중에서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다. 그렇다고 쓸모없는 존재도 없다. 어떤 이는 향기로운 삶을 살아가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도 있다. 사춘기 소년처럼 철없이 굴기도 하고 서툴고 이기적인 마음 탓에 사랑을 놓치기도 한다.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남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일에 거침없이 삶을 밀고 나가는 이도 있다. 기쁜 눈물이든 슬픈 눈물이든 눈물을 흘려야 하는 날들은 오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의 나날이 계속되기도 하지만 기어이 꽃은 핀다. 아니 피워낸다. 남들이 다 잘하는 일을 나도 잘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진짜 매력을 놓치지 않는다면 지금의 삶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챙겨주고 배려해주는 손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법도 점차 알아가게 될 것이다. 커커는 어쩌면 이렇듯,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와 쓸모를 알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 그대에게 들려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주연의 자리가 아닌 조연의 자리로 비켜선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