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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장마로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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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장마로 오다

[ PDF ]
이설 | 청어 | 2013년 06월 2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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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년 0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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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용량 PDF(DRM) | 1.58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327쪽?
ISBN13 9791158602154

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나에게 늦은 소설쓰기란 추억을 꿰매는 초라한 출발에서 시작되었다. 거울을 통하여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었고, 내면의 얼룩진 상처와 부서진 조각을 치유하며 극복하는 작업이었다. 첫 장편소설 『끝섬-사랑하기 전에 이미 그리움』이 꿈을 기억해야 하는 자조의 할큄이었다면, 『사랑, 장마로 오다』는 자각을 실현하고자 하는 치유의 거울이었다. 또한 상처가 다시 덧나도 좋고, 딱지가 떨어져 지혈되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나만이 볼 수 있는 굴절된 양심을 어루만지고 싶은 작업들이었다.

무릇 중년에 반추하는 유년의 추억은 아름다운 기억만이 착상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잊도록 진화된 인간의 뇌 어느 한구석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무례하게 스스로의 거울을 비추어보며 오랜 세월 봉합해놓았던 상처를 끄집어내는 작업에 집착했다. 기억은 점점 더 명료해졌고, 아픔은 점점 더 가까이에서 돋았다. 기억 속의 아픔은 타인의 아픔이기 이전에 나의 아픔이었고, 어쩌면 내가 치유해야 할?아픔이라고 보아야 옳았다. 상처는 더욱 깊어졌고, 누군가에게 울고 거듭나기를 소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울고 거듭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시간들, 감히 또 다른 치유를 구실로 긁적거리려니 내 추억들은 비로소 두려움으로 아우성이다. 아우성치는 미지의 두려움과 싸워야 하는 나는 참으로 나약하고, 심장의 깊이는 속절없이 야위어 있다. 더불어 담겨져 있는 그릇의 크기는 보잘것없고, 뜨거운 열정이나 모험도 턱없다. 필부의 가야 할 걸음에 보이지 않는 길은 멀고, 끝은 자욱한 이유이다.

그래서 오늘, 용기를 북돋는 두 번째 장편소설의 채찍에 더없이 작고 초라하게 움츠려진다. 민망함을 위장하려는 부끄러운 마음조차도 기둥 뒤로 빠끔히 숨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과분한 축복인가 싶다. 어디에 숨고, 어디로 도망하여 잠수라도 해야 하는가, 곰곰한 생각이 나를 또 불현듯 일으켜 세우기를 외람되게 갈망해본다. 그 끝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라도 가야 하고,?가서 행복한, 또 다른?담금질 같은 운명의 길이기에…….
두려움에 나약하고, 심장이 야위었고, 그릇이 보잘것없고, 열정이나 모험도 턱없는 나에게…… 늘 용기를 주는 분들, 세상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고마운 분들, 그리고 아내와 아들과 가족들에게, 여전히 졸필인 이 책을 바친다.
---작가의 말
탈진한 그녀가 중심을 잡으려 비틀거렸다. 하지만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결국 몇 걸음을 내딛다가 내 앞에서 풀썩 무릎을 꿇었다. 나는 엉겁결에 등 뒤에서 양쪽 팔을 잡았다. 그러나 손바닥은 엉뚱하게도 겨드랑이가 아닌 가슴을 움켜쥐고 말았다. 나는 주인에게 들켜버린 도둑놈처럼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아아,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짧은 인생의 절반을 그토록 혹독하게 사랑하게 만들었던 그녀는, 앞으로 살아가는데 평생 그리움으로 남겨야 할 숙제이다. 그리워서 더 그립고, 아득해서 더 아득한, 극의 끝에서 극을 바라볼 수만 있어도 행복으로 여겨야 할 과제이다. 그녀를 사랑함으로 행복했다. 그녀와 같은 세상에 있어서 아름다웠다. 우주 속을 떠도는 작은 지구, 지구 속에 머물다 가는 아주 작은 그녀와 나의 존재, 그 티끌 같은 가능성에서 이미 충분히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후회는 하지 말자. 끝까지 소유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일 수 없다.
---본문 중에서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사랑, 장마로 오다」
지독한 장마가 전국을 강타한 여름, 평화롭던 충주의 시골 마을에 강물이 치밀고 역류했다. 집이 침수되고 마을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떠내려가는 지붕에 매달려 울부짖던 위험한 할아버지를 구한 동갑내기 조정라를 부축하다가, 등 뒤에서 엉겁결에 가슴을 만지게?된 16살짜리 ‘나’는 평소 선망하던 그녀에게 벼락같은 사랑을 품게 되었다.
장마에 집이 완전히 휩쓸려 애달프게 된 정라의 천막을 기웃거리는 버릇이 생겼고, 어느 날 천막 안을 훔쳐보다가 들켜버려 가슴 사건의 비밀 유지를 강요받았다. 그녀가 서울로 이사할지도 모른다는 풍문에 신진수를 비롯한 소위 ‘무대뽀삼형제’와의 싸움에서 이겼고, 미친 아저씨가 사는 공터로 끌고 갔다. 적당한 공포 분위기를 앞세워 풋사랑을 고백하면서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는 황홀한 감정을 확인하게 되었다.

「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정라의 집에 비록 폐암이라는 시한부의 몸이었지만 한국동란 중 행방불명되었던 정라 큰아버지가 20여 년 만에 감옥에서 석방되는 반가운 일이 발생했다. 정라 큰아버지의 소식에 곧바로 마을은 술렁거렸다. 폐에 물이 찬 정라 할아버지가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면서 살갗이 거뭇거뭇 매를 맞은 사람처럼 변색되어 가는 이유를 확인한 정라 큰아버지의 분노가 상갓집을 발칵 뒤집었다.
천막을 기웃거리며 정라를 염탐하려던 나는 정라 큰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나타나 보복하겠다며 울부짖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마을 사내들의 만류로 보복에, 실패한 정라 큰아버지의 통곡을 보게 된 와중에도 하얀 소복이 오히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정라에게 매료당하고 말았다.
차일피일 기회만 엿보던 사이?연락처도 없이?정라는 서울로 이사했고, 하물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있었던 소동은 거짓말처럼?수면으로 가라앉아 너무도 빠르게 잊혀갔다.
그러던 어느 하교 날, 하천 둑에서 유령처럼 정라를 만나 고등학교 시험 전에 큰집에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비로소 아득한?그리움에서 벗어났다.?그러나 폐암으로 석방된 정라 큰아버지는 넉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그녀가 기거하는 큰집 장례식에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는 기회를 얻어 정라를 만나, 서로 “서울에서 합격하면 연락해.”라는 인사와 함께 악수를?했다. 일순간?뜻밖의 정전기에 소스라쳤고, 그 충격으로 정라가 바가지를 떨어뜨렸다.?더욱이 바가지를 주우려던 그녀의 가슴골을 훔쳐보게 되면서 나는 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첫 키스의 향기」
정라 생각이 앞을 가려, 성적이 속절없이 추락한 나는 서울의 야간고등학교에 겨우 들어갔고, 그녀는 우수한 학교에 합격했다. 그녀가?이사한 우이동 주소를 확보해 챙기고, 이문동 이모네 집으로 상경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정라를 놀라게 하려고 우이동 주소지에 잠복한 끝에 마침내 그녀를 만났고, 우정과 첫사랑을 탑처럼 쌓아갔다.
생각에도 없는 미팅에 대타로?엮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미팅을 주관한 녀석과 연락이 두절되는 사태가 발생했다.?엉뚱하게 우이동계곡으로 미팅 장소가 바뀌었고, 계곡에 도착해서는 녀석이 가지고 오기로 한 쌀이 없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다.

나는 꾀를 내어 쌀을 얻으러 정라를 찾아갔다. 부모님이 외출하고 둘만이 있는 집에서 쌀을 봉투에 옮겨 담으려다가 선풍기 바람에 흩어진 쌀 먼지가 그만 그녀의 눈에 들어가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고였고, 깔깔한 눈을 불어달라며 그녀가 얼굴을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당황한 나는 눈을 불면서도 연신 그녀의 입술을 훔쳐보다가 용기를 내어?기습적인 키스를 감행했다. 그녀는 주먹으로 암팡지게 가슴을 치며 키스도 비밀로 하라는 앙증한 애교를 부렸다.

「철길이 닿는 바다」
여름방학을 기하여 고향에 머무는 동안, 신진수가 찾아와 무대뽀삼형제와 망상해수욕장으로의 여행을 제의했다. 다양한 추억과 사건을 경험한 바닷가의 마지막 밤, 해변의 별빛에 취하여 무대뽀삼형제 중 음영석에게 정라와의 첫사랑 이야기를 발설하고 말았다.?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영석은 정라 집안과?우리 집안의 얽힌 사건을 알려주었다. 무릇 정라 큰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도끼 사건의 전말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좌익과 우익의 소용돌이에 그녀와 나와 진수의 아버지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역동적이었던 정라 큰아버지는 좌익단체에 가담하여 마을 곳곳을 누볐다. 우익이었던 아버지와 진수 아버지는 정라 큰아버지와 격돌했다.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정라 큰아버지는 자취를 감추고 행방불명되었다. 종전 후 정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마을 공회당에 끌려와 우익청년들에게 보복을 당했다. 집단폭행의 보복은 치명적이어서 실신한 부자를 가마니로 대충 덮어 공회당 귀퉁이에 방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결국 누군가가 야음을 틈타?실신한 부자를 피신시켜 겨우 생명을 구했다.
사건은 봉합된 채 20여 년이 흘렀고, 정라 큰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고 할아버지의 주검이 변색되면서 다시 불거진 사건이었다. 하물며 미친 아저씨가 정라 큰아버지의 똘마니였고, 공회당의 폭행사건으로 뇌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전해 듣게 되었다.

「검은 그림자」
해수욕장에서 돌아온 뒤풀이로 하천 둑에서 우정을 과시하던 중, 신진수의 집에 불이 났다.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던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재빠르게 도망치는 두 명의 청년을 목격한다. 다행히 불은 잡혔고, 방화라는 증언이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나는 함구했다. 헛소리를 해대는 미친 아저씨가 범인으로 몰렸으나 입증하지는 못했다. 화재 진압 과정에서 진수의 여동생 신진영이 ‘나’의 형 석우의 가슴팍에 안겨 공포를 달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나는 강한 의구심을 품게 된다. 이튿날 미친 아저씨가 논바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라를 향한 그리운 마음에 우이동 공원으로 쫓아갔다.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 그녀의 오빠 정호가 다급하게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행동을 목격했다. 정라에게 정호가 데모를 하다가 고향의 큰집으로 피신한 것을 전해 듣게 되면서 그가 혹시 방화범이 아닐까 하는 것과 미친 아저씨의 죽음과 연루된 의구심이 강하게 솟구쳤다.
정라가 집으로 쫓아가고, 나는 울적한 마음으로 혼자 골목을 내려올 즈음 도망치듯 뛰어 내려오는 정호와 울며 뒤따라오는 정라와 맞닥뜨렸다. 공교롭게도 정호의 길을?막아선 꼴이 되었을 때 눈치 빠른 정호에게?정라와 사귀는 것이 들켜버렸다. 정호는 나에게 서로 원수지간임을 알고도 사귀느냐는 것을 힐책하며?차후 근접을 못하게 못을 박았고, 정라에게 왜 두 집안이 원수지간인지 확인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쫓기는 몸으로 강제 입영의 길로 떠났다.

「굴레의 사슬」
정라가 소식도 없이 이사 간 사실을 알았지만 어느 곳에서도?행적을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형을 붙잡고 정라와 나의 집이 원수지간이 된 좀 더 정확한 과거사를 캐물었다.
70여 년 전, 양반집 지주였던 정라 고조부와 머슴들인 우리 고조부와 진수 고조부가 있었다.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마을이 모조리 불태워지고, 충격을 받고 앓던 증조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라 할아버지는 고작 네 살이었다. 그러나 남아 있던 토지마저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친일파가 어린 할아버지의 지장을?받아가면서 일순간에 증발되어 버렸다. 멸문의 길로 추락한 정라 할아버지는 고향을 버려야 했다.
할아버지가 가족을 이끌고 객지인 충주로 나올 때 머슴의 후손이었던?진수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가 신의를 받들었다. 훗날, 정라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보국대에 끌려갔다. 그곳 다리 건설 현장에서 교각의 옹벽이 무너져 급류에 휩쓸려간 우리 아버지를 정라 아버지가 구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모두들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마르크스에 심취한 정라 큰아버지의 좌익과 마을 구장을 주축으로 한 우익이 생겨났다. 전쟁이 터지자 정라 큰아버지는 행적을 감추었고, 마을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 피난을 떠났다. 휴전이 되었지만 정라 큰아버지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급기야는 공회당에서의 집단폭행 사건이 터졌고, 인사불성이 된 정라 할아버지와 정라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가 야음을 틈타 몰래 빼돌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형 석우로부터 얽히고설킨 조상들의 과거 이야기를?듣고 나는 오랜 동안 열병을 앓았다. 더구나 석우가 신진영의 몸에 손을 댔다는 소문으로 마을을 떠나 연못둥지과수원으로 이사하게 되는 일련의 사태가 터졌다. 머슴의 큰아들인 형은 머슴과 가해자의 딸인 진영을, 머슴의 작은아들인 나는 지주와 피해자의 딸 정라를 사랑했다. 하물며 진영은 정라보다 나이가?두 살 아래였다.
정라와의 연락은 요원한 채 희망조차 없이 3학년이 되던 어느 날, 그녀의 학교 앞에서 잠복하면 된다는 묘안을 비로소 생각해냈다. 곧바로 행동으로 옮긴?나는 며칠째가 되어서야 겨우 정라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신내동으로 이사한 사실을 확인하고, 조상들의 과거로 촉발된 반목임을 알게?되었어도?애원하듯 설득하여 겨우 편지 연락만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점점 비참해지는 집안 사정으로 대학마저 포기하게 된 그녀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훗날 결혼을 운운하는 편지로 근접조차 차단당하는 결별의 길로 다시 들어서고 말았다.

「연못둥지과수원」
나는 공부를 게을리한 탓으로 대학을 포기하여 낙향했고, 정라를 향한 그리움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과수원 일에 관심 없는 형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던 어느 날, 동갑내기 고종사촌 여동생이 혜진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과수원에 찾아왔다. 까칠한 정라에 비해 요염하고 상냥한 혜진에게 은근히 끌리는 감정을 느낄 즈음, 혜진이 나와의 데이트를 목적으로 방문한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일주일 후, 군 입대를 자원했다는 신진수가 무대뽀삼형제와 예고 없이 찾아와 월악산으로 버섯을 따러 간?탓에 혜진의 방문 맞이를 펑크내고 말았다. 마침 군에서 휴가 나온 석우가 혜진을 대신 응대해주었다는 소식과, 함께 동행한 신진영을 보고 석우의 교제가 공식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석우가 귀대한 다음 날, 나는 정라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쳐 무작정?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정라와 편지를 주고받던 신내동 주소에서 온종일 잠복하던 중, 그녀의 할머니가 막 돌아가시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어?어쩔 수 없이 걸음을 되돌렸다.
이튿날 다시 정라의 집으로 향하던 중, 문병 왔다가 돌아가던 정라의 고향 동창과 언덕에서 맞닥뜨렸다. 동창에게서, 그동안 할머니의 치매로 인해 힘겨운 날들을 감내했던 정라의 참혹한 가정 현실을 듣고, 가슴이 에이고 부끄러워 정라 앞에 나서기를 포기할 생각을 했다. 다행히 동창에게 이끌려 집으로 올라가 적잖이 놀라는 정라를 잠깐 본 사이,?정호에게 발각되어 접근조차 못하도록 차단을 당하고는 무거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정라가 뒤쫓아 와, 마음이 복잡하고 너무 힘들어서 연락을 못했다며 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한참을 보듬고 훌쩍이는 재회에 성공했다.
정라는 다시 편지를 과수원으로 보내며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던 겨울, 폭설 같은 첫눈이 온 날, 그녀가 느닷없이 연못둥지과수원에 찾아왔다. 과수원을 한 바퀴 구경하며 강제 입영된 정호가 사고를 쳐 결국 말뚝까지 박게 되었다는 언짢은 가족 소식을 전하면서도, 과수원의 풍광에 매료되어 감탄하는 그녀의 무구함은 내 마음을 한층 달뜨게 하였다.
나름 어머니의 환대를 받고, 유년의 추억이 깃든 탄금대로 데이트를 떠났다.소복하고 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새기며 소박한 유년의 추억을 반추했다. 패전한 신립 장군이 투신했다는 열두대에 올라 고향의 정취에 흠뻑 취한 데이트였다.
상경할 고속버스 시간이 가까워져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 정라의 손을 잡고 끌다가 와락 미끄러지며 꼬꾸라지는 사태가 터졌다.?미동도 할 수 없는 아찔한 공포가 스친 순간,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누가 작심하고 저지른 입맞춤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고, 거친 숨소리에 섞인 입술의 감촉에 마취되었다.

「안개 속의 덫」
일 년 동안 정라는 두 차례 과수원을 방문했고, 나는 입대를 했다. 8주의 보병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골짜기 보병대대 차트병으로 배속되어 상황실의 모든 자료를 재정비했고, 팀스피리트 훈련에 차출되었다. 훈련캠프에서 혹사당한 몸을 추스르려 의무막사에 쓰러져 있던 중, 부상병을 이끌고 온 신진수와 운명처럼 맞닥뜨렸다.
진수와의 대화에서 정호가 같은 사단 교육대 장기하사이며, 유독 자신을 갈구고, 진수 집에 불을 지른 사람이 정호로 의심된다는 푸념을?들었다. 정호와 진수, 정라와 나, 석우와 진영…… 철저하게 맞물고 돌아가는 엉킴에 나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외면했다.
첫 휴가를 나와 정라에게 줄 정표로 금반지 하나를 사서 상경했다. 그러나 아직 어려 받을 수 없다는 핑계로 거절당하고, 더구나 실쭉하여 술에 만취되어 강제로 입맞춤을 시도하려다가 저지당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는 그녀가 이모 집까지 데려다 준 사실을 알고 후회했으나, 통화도 하지 못한 채 귀대하고 말았다.
진정으로 사과하면서, 면회라도 왔으면 하고 종용하는 애원의 편지를 수차례 보냈다. 그러던 차에 거짓말처럼 그녀가 부대로 면회를 왔다. 하물며 외출을?얻어 부대를 벗어나 낙산해수욕장까지 구경하게 되는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정라는 속초에서 곧바로?상경하지 않고, 굳이 부대가 있는 소도시에서 버스를 타겠노라며 다시 부대 근처까지 동행해주었다. 그러나 동절기와 하절기의 버스시간 수정 착오로 차를 놓치게 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고민 끝에 부대 앞 구멍가게에 그녀를 맡기고 외박을 신청했으나 인근 부대의 삼청교육대 폭동으로 비상이 걸려 나오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비상이 종료된 이튿날,?다시 외출을 나와 밤을 꼬박 밝혀 하루 사이에 퀭해진 그녀를 못내 아쉬워하며 마중했다.

「뒤틀리는 운명들」
상병이 된 어느 날, 맹장염에 걸려 군단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수술 위로를 명분으로 석우가 면회를 왔다. 석우는 이미 아이를 가진 신진영과의 구체적인 결혼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신진수가 총으로 자해를 해?불명예스러운 제대를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신진수는 삼청교육대 교관으로 있었는데, 상급자의 명령에 불복하다가 저지른 자해후유증으로 턱이 날아가 너덜거리고 혀가 마모되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졌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정라가 면회를 왔을 때 걸린 비상과, 사건의 배후에 정호가 연관되었다는 의구심을 석우 앞에서 철저히 함구해야 했다.
서둘러 퇴원을 자청하고 위로휴가를 받았다. 그리고 진수를 찾아갔다.?조준점이 없는 단순한 시선, 어떤 물체의 움직임에도 반응이 없는 무정형의 눈동자, 일그러지고 떨어져나가 너덜대는 턱관절의 언저리…… 오지 말았어야 할 자리에 온 것 같아 눈물에 앞서 소름이 돋았다.
그가 쓰고 내가 말하는 방법으로 진행된 의사소통은 빨리 죽고 싶다는 마음과, 진수의 집에 불을 지른 범인이 정호 같다는 짐작과, 나도 조심하라는 주의사항과, 형수가 될 신진영을 잘 부탁한다는 당부였다.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돌아 나오는 길에 진영과 마주쳤다. 단순한 인사만으로 헤어진 진영을 뒤로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정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가 사기혐의에 연루되어 유치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정라를 만나지 못한 채 귀대했다. 시간이 흘러?제대 하루 전, 작전중사가 만취한 나를 선술집으로 끌고 나가 여자를 넣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다행히 동정을 지켰지만 처음 알몸으로 여자와 함께?잔 수치심에 괴로웠다. 정라에게 스스로 전화도 하지 못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동안 석우의 결혼식이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식장에 나타난 진수를 겨우 찾았으나 손을 맞잡은 것 외에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피로연에서 진수가 혀에 설암에 생겨 시한부를 통보받았다는 무대뽀들의 말을 듣고는?대책 없이 가슴이 조여 왔다.
신혼부부가 여행을 떠난 이튿날, 진수는 결국?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는 분명 자살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심증만으로 사건을 발설한다는 것이 위험한 발상이고, 결과를 알게 된다손 치더라도 무의미하다는 판단으로 역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사돈이 된 아버지는 진수를 연못둥지과수원에 묻을 것을 제의했고, 다음 날?진수는 곧바로 과수원에 묻혔다.?하지만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진영의 슬픔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세월 앞에 탈선의 부끄러움을 조금은 희석시킨 나는 정라를 만나기 위해 상경했다. 하지만 이미 혼기가 차오른 정라가 낯선 사내와 선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는 질투심이 폭발하여 폭음과 집착을 부렸다. “이런 게, 고작 이런 게 니 사랑이었어?” 맹랑하게 토라져 밖으로 나가는 정라를 잡지 못한?나의 궁색한 사랑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색깔이 다른 피」
정라의 노여움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나 또한 가축사육을 비롯한 온갖 일을 벌여놓고도 나날이 되풀이되는 석우의 태만에 갈수록 염증이 높아만 갔다.?결국 석우와 충돌했고, 강력한 항의를 하다가 뺨을 맞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석우는 집을 뛰쳐나갔고, 그가 돌아오지 않는 밤을 뒤척이다가 된통?열이 오른 조카를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진영을 자전거에 태워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꼴이 되었다. 다행히 경기까지 하던 조카의 열은 잦아졌고, 진영이?심증이 간다는 연못둥지술집으로 석우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접대부가 된 혜진과 술집에서 맞닥뜨렸다. 혜진은 그녀를 바람맞힌 유일한 사람이 나였다는 푸념을 쏟아내며 비아냥거렸다.?나는 월악산으로 버섯을 따러 간 사이 과수원을 방문했을 때 맞상대를 해준 석우를 유혹했을 혜진을 무시했고, 술에 만신창이가 된 석우를 병원으로 데려다주고는 내처 집으로 돌아왔다.?그날 밤, 배변을 흩뿌릴 정도로 지독한 노환을 겪고 있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까지 감내해야 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는 아예 과수원을 떠나 서울로의 상경을 결심했다. 그 사이 혜진이 타락한 연유가 궁금하여 동갑내기 사촌을 만났지만, 제대 전날 만났던 술집여자와 사연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동정심을 접었다. 마침내 나는 연못둥지과수원을 떠나 상경했다.

「성을 떠난 사막」
서울로상경한 나는 곧바로 정라를 찾아가 잠복한 끝에 때마침 외출하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에게 상경 사실을 알리고는, 당시에는 술에 취해서 집착을 부렸다며 진정으로 사과하는 자세를 보였다. 나를 조금은 용서한 그녀는 약속이 있다며 겨우 이튿날의 데이트를 허락했다.
정라와의 데이트,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함께 하면서 정호의 제대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가족의 성화에 떠밀려 또 선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솟구치는 질투를 참아내는 인내를 보였다.
저녁을 마치고 정라를 배웅해주던 길에 대학 구내식당의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그녀의 어머니와 마주쳤다. 어머니는 의아해하며 서로 연애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보였다. 그렇다고 말하기를 바라는 내 욕심과는 달리, 정라는 단순한 시골 동창이라서 만났다는 말을 굳이 못 박았다. 어머니는 고향에 있는 내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의심을 접었다.
쉽사리 취직이 안 되어 고심하던 터에 동창에게서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다이어리를 제작하는 공장이었다. 창피하고 알량했지만 정라에게 취직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데이트를 신청했으나 제대하여 외국계회사에 취직한 정호와 함께 온 가족이 고향 선산에 가기로 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비로소 정호의 전면적인 등장의 신호탄이었다.
비록 아르바이트지만 열심히 했다.?특근이 결정된 크리스마스이브에 잠깐 정라를 만나 스카프를 선물했다. 그녀에게서 정호의 정치적 소신에 대한 불만과 점점 큰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에 대한 푸념을 들었다. 정호는 의외로 자신을 학대하는 일을 일삼았는데, 술에 만신창이가 되어 차로 한가운데 널브러져 즉사할 뻔했던 일까지 저질렀다며 하소연까지 했다. 정라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음을 공장장에게 통보받았다.

「장남들의 곡예비행」
아르바이트 일을 마무리하고 정식 직원으로 출근하기 전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조카에게 줄 종합선물세트까지?사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과수원을 찾았으나 분위기는 의외로 썰렁했다. 진영의 입을 통하여 들은 사건의 전말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석우가 시비에 휩쓸려 상대의 이빨을 부러뜨려 소송을 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합의금 마련을 위해 키우던 가축을 모두 팔아버렸다는 것이다. 폭행 사건의 진위에는 혜진과 연못둥지술집이 개입되어 있었다.
때마침 피해자와 합의를 매듭짓고 돌아온 아버지에게 석우에 관한 두 가지 비밀 이야기를 들었다. 장녀가 있었는데 어릴 때 죽어 석우가 장남이 아니며, 갓난아이 때 큰 사고가 있어 후유증으로 어떤 일이든 벌여만놓고 방관하는 모양이라는 회한이었다. 금시초문의 과거사였다.
그날 밤, 석우는 돌아오지 않은 채 마루에서 요강에 소변을 보던 조카가 부엉이 소리에 놀라 나자빠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연못둥지과수원이 폐가로 가는?여러 징조들을 아버지로부터 비로소 들었다. 진수 무덤을 과수원에 잘못 썼다는 아버지의 후회, 한밤에 전 서방을 부르는 목소리에 몽유병 환자처럼 밖으로 걸어 나갔던 석우, 4대를 내리 출산일에 죽은 어미 개……. 그 밤, 마침내 술 취한 석우와 함께 과수원까지 혜진이 찾아왔다. 혜진은 석우가 너무 취해서 동행했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진영과 한바탕 충돌했다. 혜진과 진영이 동시에 임신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마침내 진영은 새벽에 조카와 함께 가출해버렸다.
나는 술집을 찾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석우를 놓아주라는 엄포를 남겼고, 처음 혜진을 과수원으로 끌고 온 사촌을 만나?혜진을 설득해서 황당한 관계를 중단시키라는 강력한 주문을 했다. 다행히 진영은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추락의 길로 점철된 연못둥지과수원을 두고 상경하여 정라에게 더욱 집착했다.
진영의 아이는 유산되었다. 혜진은 중절수술로 아이의 생명을 끊어냈고, 석우는 시내에 두유대리점을 내는 일을 저질렀으며, 그의 술버릇은 날로 심해진다는 소식이 서울로 속속 당도했다. 그러던 중 무작정 과수원으로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새벽 버스로?고향으로 향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과수원에 도착할 즈음, 개울에 빠져 인사불성이 된 석우를 리어카에 태우려 텀벙거리며 질퍽이는 진영과 맞닥뜨렸다. 진흙탕에서 실성한 징조를 보이는 진영을 발견하고 둘을 리어카에 싣고 과수원으로 끌고 오던 길에, 뒤따라 들어오는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석우가 낸 두유대리점이 망하고, 혜진이 있는 술집에서 놀음까지?벌여 과수원이?날아간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하물며 석우는?혼자 죽겠다고 술을 먹고 연못으로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것을 혜진에 소리쳐 겨우 살리기까지 했다는 황당한 일들이 벌어졌다며, 과수원에 귀신이 씌었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사과를 판 약간의 돈으로 우선 서울에 방 한 칸의 전세라도 얻어놓으라는?이유 때문에 연락했다는 말을 덧붙였다.?때마침 소나기가 뽀얀 물안개를 뿜어내어, 정라가 그토록 살고 싶다며 감탄하던 연못둥지과수원이 스모그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온 가족의 상경 길에 석우와 진영은 없었다. 석우는 놀음으로 사기를 친 패거리들과 해결할 일이 남았다며 충주에 잔류했고, 비 오는 날 진수의 무덤가에서 웃고 울고 손뼉을 치며 끝내 실성한 진영은 친정에 넘겨졌다. 하물며 진영은 혜진의 술집에 불을?질렀다는 신고로 경찰에 잡혀갔으나 아버지의 노력으로?풀려나왔다. 반파된 술집은 철거되어 동네에서는 앓던 이가 빠졌다며 반겼고, 혜진은 종적을 감추어 소식을 아는 이가 없었다.
정라의 집안 또한 편하지만은 않았다. 정호가 술에 취해 동료와 넘어지면서 뇌출혈이 진행되어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문병을 결심했다. 병원에서?마주친 정호, 그는 의외로 예전의 독기가 꺾여 있었다. 정호와의 독대에서 진수 집에 불을 지른 당사자가 정호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가 그렇게 변한 배경에는 빨갱이라고 하면서 자행되었던 석우로부터의 집단폭행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호는 진수가 그렇게 된 것을 후회하는 고뇌와, 무식하지만 우직했던 진수의 회한으로 자괴심까지 노출시켰지만, 나는 가장 큰 걸림돌로 떠오른 형 석우를 원망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길」
설날 이후, 결혼을 종용하는 집안의 성화에 밀린 정라가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며 나의 방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과수원에 일어났던 그간의 내역을 처음으로 밝히고는 이제는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는 말과 함께 죄인처럼 머리를 떨어뜨렸다.
정라의 집 방문은 공교롭게도 회사의 야유회 날과 겹친 시련의 시험대였다. 어머니의 엉뚱한 연락으로 모든 친척이 모인 줄도 모르고 야유회 차림 그대로 찾아간 후줄근한 모양새부터가 촌극이었다.?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같은 고향 사람이고 오랫동안 사귀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는 물론 정호와 하물며 큰아버지의 유복자까지도 이유를 다는 반대는 없었다. 아마도 정라의 결정 앞에 반대는 무의미하리라는 현실을 너무도 쉽게 인정해버린 결과인 듯싶었다.
그러나 벽은 엉뚱한 곳에서 돌출했다. 그녀의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석우와 진영의 결혼 사실을 듣고 놀라며 강력한 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서고 말았던 것이다. 원수이며 나이도 어린 신진영의 아랫동서로 보낼 수 없다는, 딸 가진 어머니의 근심이 이유였다.
정라는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에 비례하여 사랑이 더욱?깊어지는 반전을 보였다.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일까,?그녀는 우리 집까지 밀고 들어오는 용단을 단행했다.?정라는 어머니의 당연한 환대를 받았다. 물론 정라 아버지와 서로의 목숨을 주고받은 아버지의 호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와 중랑천 둑을 걸었다. 그러나 기껏 자리를 피해 피신했던 석우와 조카, 진영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병이 다소 완화되어 상경한 진영은 그녀도 알아보지 못하고 허공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반응이었다. 정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의문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여, 진영이 넋을 놓은 경위와 과정을 가감 없이 풀어놓았다. 정라는 실성까지 한 진영을 보고 적잖이 놀라서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진영의 실성까지 알게 된 정라의 가족은 반대 입장으로 선회하였고, 정라 어머니는 더더욱 반대를 굽히지 않았다. 빈곤의 대물림을 원치 않으려는 의지에, 실성한 원수 집안의 진영이라는 장벽이 덧대어졌다. 그 와중에 여동생 양희가 중대 선언을 했다. 평소 마음에 두었던 서울 사람을 만났느니 빚이라도 얻어서 결혼을 강행하겠다며 의지를 꺾지 않았다. 가족의 도리로 예식 비용에 보태기 위해 나는 매달 일정금액을 제하는 조건으로 저당 잡힌 마이너스 인생의 길로 더욱 추락했다. 내게는 봉급을 잘라 갚아야 하는 채무만이 남겨졌다.
여름은 더디게 흐르고, 정라는 나를 두고 버티는 한계점이 좁아지고 있었다. 결국 용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끝까지 소유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일 수 없으니 이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를 만나 마침내 이별할 것을 통보했다. 그녀는 내 가슴팍에 눈물을 묻었다.
그녀의 제의로 이별 연습을 위해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애잔한 바다에서 그녀가 싸온 김밥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훌훌 날아서 자유롭게 떠나라는 이별 이야기를 거듭 꺼낸 사람은 나였고, 정라는 그동안 자신을 안고 싶었던 생각은 없었냐는 당황스러운 물음까지 던졌다. 그러나 끝까지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취하기 위해 억지로 술을 쏟아 부었다. 폭음을 하면서, 빈털터리인 나를 버리고 풍족한 미래를 선택할 것을 거듭 종용하며 이별을 강요했다. 영원한 이별은 공식화되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울다가 꼬꾸라졌다. 나 또한 꼬꾸라진 그녀 옆에 널브러져 깊은 암흑으로 스러져버렸다.

「연리지를 꿈꾸다」
눈을 뜬 새벽, 여전히 풀풀거리며 알코올의 잔량을 밖으로 뿜어내고 있는 사랑스러운 정라를 선택하기로 나는 비로소 굳게 결심했다. 고조할아버지부터 맺어졌던 굴곡의 대물림, 식민지를 함께했던 할아버지들의 신의, 징용과 동란에 휩쓸려 치열했던 아버지들, 그리고 그녀와 나!
암수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짓지 아니하면 날지 못한다는 비익조같은 운명,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맞닿아서 하나의 몸이 된 연리지같은 운명.
마침내 하나가 된 서로의 몸을 통해 과거의 사슬과 아픔의 상처는 걷히고,화해와 용서와 미래의 희망이 새살처럼 돋았다.?긴 어둠을 밀어낸 먼동이……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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