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가 내게 온 것은 진짜 우연, 운명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그걸 알기에는 내 인생 경험이 너무 짧았다.
보다 큰 무언가가 파도를 일으키거나 누군가의 작은 소원이 점점 큰 바람이 되어 이런 일이 생겼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을 듯한 기분이었다. 뭘까. 뭐가 시작되고, 뭐가 끝나는 것일까?
--- p.17~18
역시 가슴이 설렜다. 아니, 설렌다기보다 달콤한 욱신거림 같은 것. 그리고 옛 상처도 아팠다.
굽은 채 펴지지 않는 왼손 엄지손가락.
그렇게 눈에 띄는 곳이 아니라서 평소에는 잊고 지낼 정도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이 간혹 움찔하는 경우가 있다. --- p.53~54
“네 손,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아팠겠구나.”
시어머니가 놀란 표정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아,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야. 나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책임이나 상처나 장애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이 아니라. --- p.168
비석 앞에서 눈을 감고 있는 짧은 시간에 나는 사토루를 회상했다.
내가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된다.’라는 결심을 했을 때다.
나는 그날 밤 바에서 사토루의 얘기를 듣고 엉엉 울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 하겠다, 발리에 가서 몸에 좋은 자무를 처방받아 오겠다, 그러니 죽지 마라, 나는 친구가 많지 않으니까, 하는 말을 했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눈앞에 있는 사토루는 건강하고 기운도 넘쳤으니까. --- p.208
뭐랄까, 아주 낯선 감각을 경험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완벽하게 용서하고 배려해 주는 듯한 감각. 성적인 사랑도 아니고, 부모 자식 간의 정도 아닌데, 정말 정당하게 한 인간으로, 생물로 사랑과 배려 속에 있다는 느낌이.
--- p.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