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었다. 겟세마니 동산의 올리브 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리도 그렇게 흔들린다. 수시로 기로에 선다. 살다 보면 각박한 일상의 전쟁터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는 몸소 보여줬다. 도망가지 말라고. 마주하라고.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기도하라고. 묵상 속에서, 명상 속에서, 기도 속에서 답을 찾으라고. 지금도 예수는 그렇게 역설한다. --- p.28~29
예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 고통이, 이 슬픔 이, 이 불행이 비켜 가게 해주십시오.” 그건 우리가 수시로 올리는 기도와 닮았다. 그런데 예수의 기도는 달랐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갔다. 그는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 p.31~32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다. 그때 에고가 부서져 내린다. 남들이 멈추는 곳, 모두가 겁먹고 뒷걸음질 치는 곳에서 예수는 한발 더 앞으로 내디뎠다. 곤두박질칠 줄 뻔히 알면서, 십자가에 못 박힐 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그래서 예수의 기도는 각별했다. 그렇게 ‘나’를 부수어버린 예수는 우주의 거대한 흐름 속으로, 신의 뜻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 p.32
그럼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만 신비일까. 내 안에서 길어 올린 두레박의 물이 온갖 마음으로 바뀌는 것도 신비다. 예수가 보여준 첫 이 적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마음을 어떻게 쓸지를 보여준다. 카나에서는 혼인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객들은 아쉬워하고 혼주는 난감한 상황이었으리라. 그때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 그것을 만들었다. 나는 거기서 ‘예수의 마음 사용 설명서’를 읽는다. “네 안에 신의 속성이 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너는 온갖 마음을 창조할 수 있다. 마치 물을 포도주로 바꾸듯이 말이다. 필요한 때,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이에게, 필요한 마음을 창조해서 써라.” --- p.65~66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라고 할 때의 왼손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몰라야 한다. 기억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에 달라붙어 있는 뿌듯함을 털어내라는 말이다. 예수는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라고 했다 . 자선은 어떻게 숨겨둘 수 있을까. 내 마음이 그것을 틀어쥐고 있지 않을 때 자선이 숨는다. ‘뿌듯함’이 포맷될 때 비로소 자선을 숨겨두게 된다. --- p.75~76
예수의 영성도 마찬가지다. 안으로 들이마신 다음에는 바깥으로 내쉬어야 한다. 일상을 향해, 현실을 향해, 사회를 향해 내쉬어야 한다.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다시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사는 거다. 가난한 마음을 찾는 게 ‘들숨’이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사는 게 ‘날숨’이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영성이자 사회적 실천이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수도(修道)’라고 부른다. 그 와중에 ‘에고의 눈’이 ‘예수의 눈’을 점점 닮아간다. --- p.113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요한 묵시록 22장 13절) 이 말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라는 뜻이다. 왼쪽이나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면서 동시에 오른쪽’이고,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며, 좌파 와 우파를 모두 품는다는 뜻이다. 그게 뭘까. 바로 ‘거대한 중도(中道)’다. 그게 예수의 정체성이다.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예수의 칼집에 는 좌파의 칼도 있고 우파의 칼도 있다.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칼을 꺼낼 뿐이다. 이것이 ‘예수의 지혜’다. 그래서 전능(全能)이다. 어느 한쪽의 칼만 쓰는 건 전능이 아니다. --- p.113~114
예수는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라고 했다. 마음의 창고를 비우라는 말이다. 우리의 창고는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창고를 채우고 있는 것, 그건 바로 ‘집착(attatchment)’이다 . 접착제처럼 끈적이면서 내 마음의 창고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집착이다. 집착할 때 마음의 창고가 가득 찬다. 집착을 비울 때면 창고도 빈다. 그 이치를 꿰뚫은 예수가 말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불교에서는 이를 “마음을 내려놓으라.”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나라의 문턱을 넘는다. 불교는 불국토(佛國土, 부처님 나라)의 문턱을 넘는다. 그 문턱을 넘어가는 첫 번째 징검다리가 서로 닮았다. ‘마음의 창고를 비워라.’ --- p.129~130
원수는 왜 생겨날까. 그것은 잣대 때문이다. 잣대의 왼쪽은 선, 오른쪽은 악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원수가 된다. 예수의 말처럼 그 원수를 사랑하면 어찌 될까. 선악을 가르던 잣대가 무너진다. 그 잣대가 무너지면 어찌 될까. 우리는 돌아간다.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간다. 혜능이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라고 한 이유도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선과 악 이전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게 ‘완전함’이다.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 p.155~156
예수는 말했다.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거기서 그물을 내려라.” 예수가 말한 ‘깊은 곳’은 갈릴래아 호수의 어딘가가 아니었다. 저 푸른 파도의 어디쯤이 아니었다. 그곳은 신의 속성이 잠들어 있는 우리 안의 심연이다. 그 깊은 마음의 골짜기다. 우리가 다시 돌아갈 고향이다. 거기서 그물을 내려야 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런데 심연이 어디 인가? 그걸 알아야 갈 게 아닌가.” 답은 어렵지 않다. 나의 고집이 무너지는 곳. 거기가 바로 심연이다. 고집에 가려서, 에고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내 안의 깊은 곳이다. 거기서 치유의 비가 내린다. --- p.198
독기만 그런 게 아니다. 자비도 마찬가지다. 자비를 베풀려면 어찌해야 할까. 먼저 내 안에서 자비심을 만들어야 한다. 그걸 모아야 한다. 그사이에 내 마음이 젖는다. 내가 만든 자비심에 내가 먼저 젖는다. 그 온기와 배려와 사랑의 감정에 내가 먼저 잠긴다. 그게 마음의 이치다. --- p.254
우리의 삶은 늘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모른다. 그때마다 마음이 출렁인다. 그 갈림길에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며 모든 걸 내맡기면 어찌 될까. 그 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의 배를 흔들던 그 모든 파도가 잠잠해진다. 왜 그럴까. 두려움이 포맷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포맷된 자리로 무언가 밀려온다. 그게 뭘까. 그렇다. 평화다. 그것이 ‘아나파우소’이다. --- p.278~279
우리는 신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수시로 ‘나’를 섬긴다. 나의 기대, 나의 성공, 나의 욕망이 성취되도록 하느님이 일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나의 뜻’을 따르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도록 기도까지 한다. “~하게 해주십시오!” “제발 ~가 되게 해주세요!” 그러니 결국 누가 누구를 섬기는 걸까. 내가 하느님을 섬기는 걸까, 아니면 하느님이 나를 섬기는 걸까.
--- p.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