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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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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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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8월 2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16쪽 | 416g | 128*188*30mm
ISBN13 9788950960803
ISBN10 89509608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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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어렴풋한 위화감을 풍기는 그 책장 앞에 가서 섰다. 저절로 흠칫했다. 줄줄이 꽂힌 책의 제목에 ‘살인’, ‘잔혹’, ‘지옥’, ‘엽기’, ‘고문’, ‘학살’ 같은 오싹한 단어가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느낌표가 유난히 많고 폰트도 일일이 피투성이를 모방한 것처럼 과장스럽다.
“이런 거 좋아해?”
도쿠야마는 등 뒤에 누워 있는 하쓰미에게 물었다.
하쓰미는 고개를 들어 팔베개를 하고 “이런 거라니, 뭔데요?”라고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코에 걸린 목소리를 냈다.
“저기 ‘살인의 뭐뭐’라든가 ‘학살의 뭐뭐’라든가 ‘고문 백과전서’라든가, 어쩐지 악몽을 꿀 것 같은 책들이잖아.”
“아, 그거요?” 하쓰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요.”라고 침대 위에서 큰대자로 우우우 기지개를 켜고 나서 말했다. “거기에 인간의 악의를 모두 다 진열하고 싶어요.”
--- p.65

“역시 괴짜구나, 너. 아주 상당히 괴짜야.”
“네, 근데 그만두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그만둘게요. 내다버리라고 하면 내일이라도 전부 다 버릴 거예요. 어차피 물건일 뿐이니까.”
“나는.” 하쓰미가 말을 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달라, 그런 말은 안 해요. 절대로 안 할 거예요.”
“아니, 자, 잠깐만.”
“안 돼요?”
“안 되다니,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 그보다 너는 지금 그대로가 좋아. 지금 그대로 괜찮다고. 아니, 그보다 우리, 서로 안 지도 얼마 안 됐고, 개성적인 면도 뭐랄까, 좀 괴짜라서 좋아, 재밌어. 그야 약간 멈칫한 건 사실이지. 여자 방에서 〈흠뻑 젖은 욕정〉이라는 포르노 비디오를 발견하면, 그야 그렇잖아?”
--- p.67~68

“이 잡지.” 하쓰미는 책장 아랫단에서 대형 사이즈의 경제 잡지를 꺼냈다. “여기 특집호에 이 시대를 주도하는 경영인, 성공인 들의 반생이니 인터뷰니 하는 게 실려 있는데, 이것도 진짜 지독해요. 지독하고, 대단해요. 그럴싸한 거짓말만 한가득. 또는 참 잘도 이런 말을 지껄이는구나, 감탄이 터지는 폭언들. 하긴 블랙기업이니 격차사회라는 게 주목받기 전이니까 이런 말도 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짜 끔찍해요. 옛날 『여공애사』의 경영자들과 기본적으로 달라진 게 전혀 없어요. 부정(不正)은 방편일 뿐이고 법률은 족쇄로 써먹고, 아무튼 자신들이 하는 일은 국가를 위한 것이니까 찍소리하지 마라, 우울증도 과로사도 노동자의 자기 책임이다, 마음대로 앉지 마라, 마음대로 쉬지 마라, 마음대로 밥 먹지 마라, 마음대로 살지 마라, 마음대로 죽지 마라, 그런 식이에요. 놀고 있죠. 놀고 있고, 진짜 저질이고 천박해요.”
이런 이야기를 아주 즐겁게 하는구나, 하고 도쿠야마는 느꼈다. ‘끔찍하다’든가 ‘진짜 저질’이라는 말을 할 때, 하쓰미는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심지어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 p.71~72

똑같은 놀이에 한없이 열중하는 아이처럼 하쓰미는 간단히 덫에 빠져들었다. 둘이서 알몸으로 침대 시트를 둘둘 말고 누워 있을 때 시력 좋은 도쿠야마는 책장의 책등을 보며 적당한 책을 골라냈다. 이를테면 “『중국의 3대 악녀』는 어때?”라고 운을 떼면 하쓰미는 열의를 담아 그 상세한 내용을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도쿠야마는 시트 속으로 기어들어가 하쓰미의 곳곳을 더듬었다. ‘불경(不敬)’이라는 말이 수없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뭐가 어찌 됐건 즐거움이 더 컸다. 이야기를 끝내고 마침내 장난꾸러기를 찾아냈다는 듯이 하쓰미가 시트 속에 기어들어간 도쿠야마의 어깨를 와악 하고 깨물면 그 길로 덮쳐들어 한 덩어리로 시트를 휘감으며 드잡이를 하는 장난에 뛰어들고, 그러다가 점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평범하게 섹스를 시작하는 것보다 한층 각별하게 쾌락이 깊었다.
이런 도입부가 두 사람의 습관이 되었다.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타고난 것인지, 하쓰미는 매번 할 때마다 똑같은 패턴에 널름 걸려들었다. 학습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그런 점이 또한 도쿠야마에게는 너무도 재미있게 느껴져서, 인륜에 어긋난 이 놀이를 그만둘 수 없었다.
--- p.90~91

“아무튼 행복은 꿈에 지나지 않고 고통이야말로 현실이에요.”
도쿠야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하쓰미는 말했다.
“아예 죽는 건 어때요?”
“참내, 뭔 소리야.”
도쿠야마는 웃었다. 강가의 다른 커플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들은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
“아니, 진짜예요. 오래 살아봤자 좋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점점 나빠지기만 하지. 죽을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젊어서 아직 상처가 적은 동안이 좋아요.”
“얘가 진짜, 뭔 소릴 하는 거야.”
“죽읍시다. 동반자살, 그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 방법이에요. 유일한 방법,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의지와 목적과 결과가 일치하고 게다가 성공의 순간이 그대로 영원이 되는 유일한 아이디어. 동반자살하자고요. 응? 응?”
--- p.164

“도쿠야마, 웬 어울리지도 않는 소리를 해?” 가타오카는 말했다. “소문에 듣던 대로 역시 좋지 않은 여자 친구인 모양이구나.”
이건 또 뭔가, 소문이라니? 도쿠야마는 내심 씁쓸했다.
“어떻게 할 거야, 그 여자 친구하고?”
“어떻게 하기는, 뭘요? 그냥 평범하게 결혼하고 살겠죠, 하쓰미하고.”
전에 후지쿠라에게 들은 말을 이번에는 자신의 주장처럼 대답했다.
가타오카가 이번에는 도쿠야마의 어깨에 손을 척 얹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또 우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침울해진 얼굴이 어슴푸레한 가운데 떠올랐다.
“아무튼 죽어도 괜찮다는 그 얘기, 좋지 않아.” 가타오카가 말했다. “도쿠야마에게 좋지 않아. 아니, 그보다 도쿠야마답지 않아. 너답지 않다고, 그런 건. 역시나 악녀였네.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악녀라니…….”
반사적으로 도쿠야마는 마녀사냥으로 화형에 처해지는 하쓰미의 모습을 연상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하쓰미였다.
“죽는다느니, 그런 소리 못하게 할 거야. 절대로 내가 못하게 하겠어. 진심이건 농담이건, 내가 절대로 그런 건 허락 못해.”
--- p.188~189

아르바이트를 막 시작했을 무렵, 도쿠야마는 히우라를 동경하고 우치바에게 의지했다. 양쪽 다 실수였다고 도쿠야마는 이제 마음을 비웠다. 우정을 나누려 했던 것조차 잊고 싶은 과거였다.
“비겁한 놈이야, 넌.” 도쿠야마는 말을 이었다. 하쓰미의 빙의가 느껴졌다. “너 같은 놈이 유대인 싣고 아우슈비츠로 달리는 열차를 태연히 손 흔들며 배웅할 놈이지. 후투족으로 태어나면 투치족을 죽이고 투치족으로 태어나면 후투족을 죽이고, 민족 정화라는 명목의 성폭행 수용소에 동료들과 몰려가 킬킬거리면서 그 짓거리를 할 놈이야. 그러고는 ‘어쩔 수 없잖냐, 인간의 본성이니까’라는 걸로 뭉개버리지. 시대가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져도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까 딱히 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라는 걸로 뭉개버려. 그런 놈이야, 너란 놈은.”
세 사람이 일제히 입을 헤벌리고 멍해져버린 것을 도쿠야마는 피부로 느꼈다.
--- p.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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