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을 열자, '안녕하세요'라는 글귀가 보였다. 어느 나라 말의 교본이든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안녕하세요'이다. 채금은 바로 그옆에다가 서툰 한글로 안녕하세요를 반복해 써놓았다. 연습장도 없이 교본에다 직접 글씨 쓰기 연습을 했던 모양이었다.
다음 장, 다음 장에도 채금의 서툰 글씨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나는 이채금입니다.
- 안녕하세요. 나는 이채금입니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느닷없이 가슴이 결려오는데, 그건 채금이 써놓은 '한국 사람입니다'라는 글자들 때문일까. 안녕하세요, 라고 나는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잠시 후에는, 안녕하세요,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라고도 중얼거려 보았다. 순간 내 입속에 모래가 한 움큼 들어차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곧 내 온몸이 모래덩어리처럼 여겨졌다.
--- pp. 42∼43
- 나비 문신을 하겠다고?
노인이 외쳤다.
- 이건 위험해. 이걸로 문신을 했다간, 자넨 평생 바다 위에 있어야 할 거야. 자네 같은 사람이 이걸로 문신을 했었지. 얼마 후에 바다에 나가봤더니 어떤 사람의 팔과 다리가 완전히 소금에 절여져서 바다에 떠 있더군. 몸통이 없는데도, 팔과 다리는 계속 날갯짓을 해대고 있었어. 내가 새겨준 문신도 사라져버렸더군. 그냥 자리만 푹 파여 있는데, 날개가 찢겨진 자리가 선명해. 너무 오래 난 거지. 나비한테 바다는 너무 넓단 말이야. 그 사람도 자네처럼 한국 사람이었는데... 참 안됐지.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나비 문신을 했단 말야. 그리고 바다로 갔는데, 팔과 다리밖엔 안 남아 있었어. 그 한국 사람의 몸통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 p 41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흐느껴 울고 있는 남편의 어깨 사이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곳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였고, 포장마차에는 이웃집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던 건 술취해 울고 있는 내 남편을 바라보는 이웃들의 시선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그가 울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 어쩌면 평생 동안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참혹하게 만들었다. 더욱 괴로운 것은 어쩌면 그 자신조차도 본인이 울고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하리라라는 예감이었다. 포장마차의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는 중년의 남자는 불쌍했다. 그리고 그 불쌍한 남자는 내 남편이었다. 나는 그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그와 함께 울고 싶었다. 그와 함께 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가 그를 일으키기 위해 그의 어깨 사이로 집어넣은 손에 힘을 주자마자, 그는 마치 더러운 것을 떼어버리듯 내 몸을 거칠게 밀었고 엉겁결에 중심을 잃은 내게 모진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 개 같은 년! 입으로만 하라고 했잖아! 더럽게 어디다가 가랑이를 벌려! 그냥 입으로 빨기만 하란 말이야!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 어차피 서지도 않는단 말야. 어차피 서지도 않는다구..... 젠장.... 너무 오래..... 서질 않았어. 빌어먹을..... 젠장......이게 전부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말야...... 그런데 이게 전부더라구.
그런데 이게 전부더라고... 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말한 '이것'은 무엇일까. 그 순간에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오래전에 그는 단지 직장만을 가지지 못했을 뿐이었지만, 이제와서는 그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부를 알 수가 없으니, 그의 아무것이 무엇인지도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 pp. 37∼38
"그래...... 맞아. 난 채금이, 말리지 않았지. 그 녀석, 내 사윗감..... 나보다 열두어 살밖엔 안 어린 그 사윗감이란 놈..... 못 볼 걸 많이 보고 산 놈은 아닌 것 같더군. 난 알아. 못 볼 걸 많이 보고 산 인간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말이야. 그래서 난 말리지 않았어. 암..... 안 말리구말구. 그렇지만, 불쌍한 것...... 채금이 이 앤 내 남아 있는 눈이 보고 있는 게 뭔지를 몰라. 그건 말이지. 죽음보다 더 한 거야. 그건 말이지...... 살아 있다는 거라구. 살아서 못 볼 것들을 모조리, 남김없이 다 봐야 한다는 거라구. 그것도 아주 천천히, 아주 오래 오래...... 가마솥 속의 개고기 뼈가 다 무르도록, 아주 오래 오래...... 흠씬 두들겨맞아 나달나달해진 살 속에서 진국의 국물이 다 빠져나올 때까지 천천히 천천히...... 아주, 아주 오래, 오래...... 그렇게 보고, 또 보고 해야 한다는 걸 말이야."
--- p 30
"당신, 사람이 죽을 때의 표정이 어떨 거라고 생각해?"
한국을 떠나오기 얼마 전,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그날도 지독한 술냄새를 풍기고 돌아온 남편은,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처럼 전혀 취하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나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를 향해 말을 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표정이야. 말하자면 넋이 나갔다고 말해야 옳겠지. 비명을 지르고, 공포에 떨고, 울음을 터뜨리는 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쪽이야."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 혼자 말을 덧붙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들은 얘기야.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 당신한테 해주는 거야. 하긴 나한테 그 얘길 해준 사람도, 들은 얘기라고 하더라. 그런데도 난 참 생생했어. 마치 내가 보고 있는 것처럼. 신기하지 않아? 당신도 그런가 궁금해. 얘기해 봐. 당신도 그래?"
내게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채금의 어머니였다. 어젯밤에 그런 꿈을 꾸었어, 라고 그녀는 말을 시작했다. 내가 본 게 아니라 채금이 아버지가 본 건데, 꿈에서는 내가 본 것처럼 생생했어. 채금이 아버지는 어렸을 때, 공개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았대. 그 얘길 평생 했지. 저도 어렸을 때 본 거라 가물가물할 텐데, 금방 본 것처럼 잘도 얘길해. 못 볼걸 보고 살아서 그런가, 그 사람 평생 재수가 없었지. 사람이 한번 재수가 없으면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그 사람, 한국에 나올 팔자도 못 되지만 나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할 때면, 꼭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의 넋으로 사는 것 같았어. 그러니 그 사람은 그냥 거기에 있어야 해. 그리고 채금의 어머니는 잠깐 동안 말을 놓고 있다가, 순간 아주 먼 곳에 다녀온 사람 같은 얼굴이 되어서, 내게 물었다. 그런데, 자넨, 거기에 왜 가?
아이를 공부시키기 위해, 아이를 세계인으로 만들기 위해...... 채금의 어머니에게도 내가 그런 말들을 읊었던가? 그러나 그런 말들은 순간 아무 소용도 없게 여겨졌다. 나는 채금의 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들을 남편에게 전부 다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묻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넌, 거기에 왜 가니? 그러나 남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만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를 또는 그를 향해 말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을.
"당신이."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므로, 나는 혼자 말해야 했다.
"내겐, 지금."
한 마디씩 끊어서, 그가 잘 알아듣게, 똑똑히.
"다른 사람의 넋으로 보여."
--- pp.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