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병원의 빈소에는 문익환이 사진으로 웃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몰려오는 조문객들 때문에, 병원 영안실이 비좁아서 이내 한신대학 강의실로 빈소를 옮겼지만 좁기는 마찬가지였다. 장례 기간 내내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빈소가 차려져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했다. 거기에는 그의 방북을 극렬하게 비판하던 사람들도 뒤섞여 있었으며, 그의 진실을 뒤늦게 신뢰한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거리에 뿌리고 다닌 숱한 아름다운 이름들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귀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이 슬퍼했다.
“문 목사님 사랑해요!”
빈소의 방명록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편지라고 해야 좋을 글들이 많았다. 영정 앞에는 붉은 장미가 놓여지기 일쑤였다. 이것은 사랑이었다.
문익환은 1918년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문익환의 가족은 ‘애국단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집안이었다.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와 여성 지도자였던 어머니를 비롯하여 훗날 민중신학자가 된 동생 문동환, 투옥과 투쟁의 현장에서 조력자 역할을 하며 민주화 운동의 숨은 공로자가 된 부인 박용길과 자녀들까지, 가족 구성원에 의해서라도 한국사의 현장을 떠나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머나먼 북간도 땅,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을 보고 자라며 일찍 철이 들었던 문익환은 명동 학교에 입학하면서 윤동주, 송몽규 등과 죽마고우처럼 지낸다. 그러던 중 명동 학교가 중국의 감시를 받는 현립 학교로 바뀌면서 공부를 중단해야하는 시련을 맞는다. 이후 일제의 식민 지배 아래 잦은 전학, 편입 등을 반복했던 그는 아버지처럼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일본의 신학교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박용길을 만나 결혼에 골인한다. 결혼 후 첫아이를 잉태하는 등 행복한 시절도 잠시, 뜻밖의 비보는 문익환을 큰 충격에 빠뜨린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소중한 친구의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마저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가는 혼란 속에서 해방을 맞이하지만, 곧이어 나라에 38선이 그어지는 분단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힘든 시대 속에서 마음을 다잡고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 문익환은 6.25 전쟁을 겪은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신학대학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한빛 교회의 목사를 역임하면서 구약학의 부흥기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50세가 되던 해, 마침내 그는 오랜 숙원이었던 꿈을 이룬다. 신, 구교가 함께 하는 성서 공동번역의 책임위원장으로 위촉되어 신학자로서 당대 최고의 영광인 성서 번역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는 ‘한국인 전체가 읽을 수 있는 번역’ 이라는 원칙 아래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서도 통하는 번역을 시도한다.
그러던 중 1970년 노동자였던 청년 전태일의 분신 사건을 계기로 문익환은 발로 뛰는 사회 운동가로 변모한다. ‘노동자나 학생이 분신하거나 투신했다’는 전화만 걸려오면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고, 집을 빼앗긴 철거민들이 울부짖는 현장에도 기꺼이 동참해 함께 슬픔을 나눴다. 수없이 많은 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을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도 항상 의연했고, 옥중 단식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끊임없이 피력했으며, 이것을 정부와의 대화 통로를 뚫는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석방 후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하였으며, 1985년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을 맡는 등 독재 정권에 맞서는 ‘민통령(民統領)’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1989년에는 72세의 나이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북’을 감행, 김일성과 회담을 갖고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반도 정치 아래 남과 북이 함께 가기를 바랐던 중립 통일론자로서 늘 고뇌하고 투쟁해 왔던 그는 1994년 1월 18일,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비록 그는 이 세상에 없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통일의 과제가 남아있는 한, 그가 남긴 정신은 우리 역사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