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는 10월, 김은형의 첫 작품 『열화일기』가 우리 곁에 온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마치 나의 첫사랑, 나의 대학 시절 이야기인 듯 빠져들어 행복했다. 나에게도 지나간 시간만큼의 삶의 이야기가 있었다. 미쳐 이름을 붙여주지 못한 채 손가락 사이로 빠져버린 모래알처럼 흩어졌지만. 열화 청춘을 일기로 날실씨실 엮어 나눌 수 있는 추억연금이 매우 부럽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열화일기』는 저자가 스무 살 대학 1학년 때 부터 10년 넘게 써내려온 9권의 일기장 중 1982~84년까지 약 2년간 써 온 첫째 권만 묶은 것이다. 수많은 독서, 친구와의 우정, 눈화장, 파마, 하이힐 등 멋 부리며 겪는 구세대와의 갈등, 대학도서관 자리잡기, 독재정권에 맞서는 이념서클 활동, 남포다방에서의 수다와 군것질, 디자이너의 꿈을 향한 1년간의 휴학, 서클에서의 첫사랑 K와의 만남, 설레임, 사랑, 어머니의 일상에서 싹튼 여성의식 등 저자의 말처럼 80년대라는 그토록 뜨거웠던 격동과 격정의 시대상이 녹아 있어 읽는 사람을 가슴 설레이게 한다.
김은형은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다. 나는 10년 전 채영이 엄마 김은형을 처음 만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순수하고 청순 발랄하고 가슴이 따뜻한 아직도 스무살 대학 신입생 같은 열정으로 산다. 이 일기에서도 멋대로 당당하고 오지랖 넓고 발랄한 생동감 있는 도전이 그대로 가슴에 들어온다.김은형은 독서광이다. 자신의 좌우명을 대학1학년 때 이미 ‘너 자신을 풍부하게 하라!’로 정하고, 수많은 즐거움 중에서 먹는 즐거움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아는 즐거움이라며 소설, 시집, 철학서적, 패션잡지 등 책 속에 파묻힌 책벌레로 자신만의 지적 유희를 즐겼다. ‘책을 안 읽으니 바쁠 수밖에’라는 책 제목처럼 바쁘고 또 외롭다고 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일기는 ‘독서 할 때 당신은 언제나 가장 좋은 친구와 함께다’라고 깨우쳐준다. 김은형은 메모광이다. 본문 중 어떤 날은 매일 써야 하는 회의가 들지만 그래도 쓰는 이유를 ‘한 40~50세쯤 되어서 읽게 되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이다. 내 젊은 날의 기록이, 내 내면의 풍경과 참으로 버라이티하고도 액티브한 나의 활동들이 사진에 찍힌 듯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노트를 읽게 되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진다’라고 썼다. 이 일기는 내 삶을 돌아보고 기록함으로써 보다 치열한 현재를 살고 창조적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김은형의 일기가 우리들의 책으로 빛을 본 것은 그녀의 영원한 벗이자 연인인 조르바 같은 그 남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 허부남 사장 때문이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린다는데 차곡차곡 기록해 온 정성, 과연 저자는 지금 어떤 느낌일까? 이 책 『열화일기』는 우리들의 삶에 보다 자유로운 영혼, 맑은 기운, 청순한 청춘의 생동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참으로 맑고 순수한 자유로운 영혼의 두 번째, 세 번째… 추억연금이 계속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2018. 시월 마지막날
- 김수자 (부산창조교육문화센터대표/전 주례여자중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