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을 붙잡고 강물을 바라보았다. 공주가 옆으로 오며 다그치듯 말하였다.
“전하, 편조 법사가 있지 않사옵니까.”
“법사라니요?”
무심결에 왕이 되물었다.
“편조 법사께서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으며 출신 또한 미천한지라, 조정에 아무런 파벌도 친당도 없사옵니다. 또 자신이나 일가붙이가 토지나 종을 수도 없이 거느린 부자도 아니옵니다. 법사야 말로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이 아니옵니까. 편조 법사를 앞에 세워 나라의 큰일을 맡긴다면 남의 눈치를 보는 따위의 비겁함은 없을 것이옵니다.”
--- p.60
왕이 붓을 들며 말하였다.
“사부, 고려의 사직이 사부의 손에 달렸어요.”
말을 마치고 왕은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법사는 고개를 들어 왕의 글씨를 건너다보았다. 그 순간, 법사는 화들짝 놀랐다. 왕이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서서誓書였다.
師救我 我救師 死生以之, 無惑人言 佛天證明.
(사부가 나를 구하고 내가 사부를 구하니, 생과 사를 같이 하리라. 남들이 무슨 말을 해도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이를 하늘과 부처가 증명하리라.)
묵의 짙고 환한 빛이 종이 위에서 법사의 눈으로 흘러들었다. 법사의 입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끝 모를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 저 빛이 내 눈을 멀게 하는구나…… 저 붓이 내 목을 옥죄는구나…….
--- p.137
어둠과 습기가 뒤섞인 어느 날 복면을 한 자객이 침입하여 일순간에 군사들을 쓰러뜨리고 신돈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신돈은 시퍼런 살기에 스르르 눈을 떴다.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거대하고 우뚝한 죽음의 그림자가 흐르는 듯 천천히 다가왔다. 신돈은 그림자가 국문 때 보았던 천운이란 사내의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신돈의 마음은 출렁거렸다. 존멸의 기로에서 조금 더 차분하지 못했던 자신을 후회하였다. 자객이 칼을 높이 쳐들자 등골이 오싹하며 식은땀이 났다. 공포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신돈의 마지막 목소리는 잘 갈린 칼에 토막 나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 p.254~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