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엄마의 삶을 어쩌지 못하고 저 사람은 끝내 불행하게 살다 갈지도 모른다는 슬픔에 압도되어, 텅 빈 방에서 대성통곡했던 일이 가끔 떠오른다. 유학을 떠나기 전 그녀의 몸 부분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갔던 나는, 이제 엄마가 되어 그 열렬함으로 내 딸들을 사랑한다. 여전히 엄마를 사랑하고 행복을 기원하지만, 너의 흰머리가, 너의 주름이, 너의 굽은 어깨가 가슴에 파이듯이 자국을 남긴다. 우리는 비로소 너와 내가 되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함께 묻는다.
--- p.17
나는 엄마의 욕망과 엄마의 삶을, 그 여자의 욕망과 그 여자의 삶으로 놓아두기로 했다. 만약 나의 개입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그동안 쌓은 시간이 만든 우애와 운 좋게 내게 있는 여유 덕분일 게다. 더불어 나는 그녀의 욕망이 지어낸 굴곡을 책임질 자 또한 아니다. 그녀를 삶의 주인공에서 끌어낼 자도. 엄마 역시, 나를 그녀 삶과 욕망의 배경과 도구로 불러들일 수 없다. 사랑했으나 멀어져야 온전한 관계도 있음을 그렇게 배웠다.
--- p.50~51
상처가 물에 뜨듯 바깥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부로 침잠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웬만한 충격에는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민감함으로 사소함을 감지한다. 그들의 촉수는 마음이 가는 몇몇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약간의 흐트러짐에도 마음을 닫아버리는 원격조종장치가 작동한다. 강해 보이지만 그것은 벼랑 끝을 버티는 단단함과 닮았다. 무너지지 않을 듯 보이지만 부서지면 끝이다. 다행히도 그걸 잘 알고 있는 건 바로 그 자신이라서 누구보다도 방어기제는 발달해 있다. 혹은, 스스로를 절벽의 일부가 될 정도로 단단히 그 자리에 박아놓거나 그 절벽이 되어버린다. 누군가는 차라리 대기처럼 가볍고 투명하게 허무해져버린다.
--- p.91~92
한 인간이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을까? 애초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음에도, 나는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억지로 밝고 명랑하고 강한 아이로 자라났다. 그녀는 희망이 없을 때마다 나를 매개로 꿈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허황된 꿈에 도사리는 중독성을 보지 못한 채, 어린 나는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나를 빌어 희망을 그리게 했다. 그녀가 내게 중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즉에 끊어버렸어야 할 그 중독을 당장의 위안을 위해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꽉 잡았던 손을 놓아버리듯 내 손에 힘을 풀고, 내게 매달린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풀어버렸다.
--- p.93~94
가슴 뛰는 조우와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는 여전히 내게 힘이 세다. 하지만 그것의 부재가 예전만큼 쓸쓸하거나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두렵지는 않다. 연애세포를 날뛰게 하고 일상을 뒤흔드는 만남보다는, 좀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는 관계에 더 흥미를 느낀다. 만일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쓴다면 기존의 사랑을 폐허로 만드는 절대적 낭만 위에 세워진 이야기가 아닌, 꾸준히 복구하고 다듬고 삶의 성숙과 함께 이뤄가는 어른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 p.121
자신의 몸을 자신의 즐거움의 원천이기 전에 타인의 욕망 속 대상으로써 가치 있다고 느낀다거나,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할 몸이라는 조건 아래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는 설정은 성의 즐거움과 가치를 외부의 조건과 판단에 맞추는 일이다. 자신의 욕망 앞에 타인의 욕망을 세우고 사회의 잣대를 더 중요하게 놓아두는 습관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저지시킨다. 남자에게 성은 당연한 즐거움이되 여자에게 성은 즐거움 이전에 보호하고 방어할 영역인 양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연애에 있어서도 여자를 더 취약한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 연애의 끝을 여자에게 더 큰 실패이자 지우기 힘든 낙인처럼 여기게도 만든다.
--- p.152
여성이라는 틀이 너무 버겁다면 내가 아끼는 관계 속에서 그걸 헐겁게 만들면 된다. 또 그런 사람들과 행복하고 다정한 관계를 만들면 된다. 어렵다면 노력하고 설득하고 협상하고 타협하리라. 무산되어도 노력의 과정은 가치가 있으리라 믿는다. 그 속에서 내가 나로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래서 더 행복하고 주변을 기쁘게 만들 수 있다면. _186쪽
삶이 무한하지 않음을 이제는 물질 자체의 문제로서 느낀다. 사소한 것에 넘치게 화내고 걱정하고 겁먹고 연연하며 살지 않겠다. 내가 누리고 함께하고 이루고 싶은 것에 좀 더 집중하겠다. 다만 그와 같은 집중과 노력이 단기간의 즐거움이나 당장의 이득에 기울어진 가치를 동력으로 두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나 하나의 것이 아니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면 살수록 나를 둘러싼 더 크고 더 위대한 것의 존재를 느낀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누구와 함께.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실수는 인정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할 일을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
--- p.201
‘성장’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그것들을 자양분 삼아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므로 ‘삶’이라고 바꿔 부르자, 여하튼. 요새 삶에는 거쳐야 할 지분거림의 할당량 같은 것이 있는 건가 싶다. 고통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그냥 지분거림 정도의 것들. 어마어마하게 힘들지는 않지만 작은 상처처럼 거슬리고, 어떨 때는 일상을 온통 뒤흔드는 녀석들. 언젠가 나을 테지만, 괜찮아질 테지만, 해결될 테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만, 당장은 나를 일렁이게 하는 것들. 위로의 말도 큰 도움이 되지 않고 별다른 깨달음도 찾아올 것 같지 않은 것들. 소음이 오가는 한낮의 거리처럼, 무음보다 더 적막한 느낌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 같다.
--- p.212~213
고유한 주체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방식은 ‘배신’을 통해서다. 우리는 모두 배신을 통해 어른이 된다. 가장 가까운 권력을 배반하고 떨쳐 일어나지 않는 세계는 무력하다. 권력은 종종 사랑으로 나를 보살피는 존재에게서 내게로 남용된다. 나의 존경과 애정이 향하는 대상으로부터 연유하기에, 나는 익숙한 권력에 스스로를 가두며 삶을 자발적으로 제한한다.
--- p.288~289
당신이 좀 더 쉽게,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랄 때 그렇지 않은 당신의 나머지는 분노와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가족이란 틀로 너무 쉽게 사랑을 짓고 안주하려 한다. 성찰과 성장이 없는 자리는 믿었던 위안보다 고통이 더 클 때도 많다.
--- p.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