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는 조선 중종·명종 때 문신으로서 본관은 울산이고 자는 후지(厚之)며,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다. 1510년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향촌 출신의 신진 사림에 속하는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조원기·김안국 등을 만나 사림의 기풍을 배웠으며,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서는 퇴계 이황(李滉) 등 신진 사림들과 교제했다.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됐고, 이듬해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한 뒤 홍문관 저작이 됐다. 1543년에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어 세자를 가르치는 소임을 맡았다. 그러나 중종이 죽고 인종이 죽은 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뒤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인종에 대한 충의를 지키면서 학문과 교육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560년에 사망했다. 1600수에 이르는 한시를 남겨 호남 시단에서 주요한 역할을 차지했고, 주리(主理)적인 입장에서 도학을 개진하며 후학을 이끌었으며,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 등에도 밝았다. 제자로는 정철·양응정·변성온·기효간·조희문·오건 등이 있다. 정조 20년(1796)에 문묘에 배향됐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역자 : 조기영(趙麒永)
무외정사 주인 조기영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읽었다. 대학에서 한문교육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전공하여 <홍만종 시학 연구>로 석사학위, <하서 김인후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도회 한문연수원과 중앙승가대학 불전국역연구원 등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권우 홍찬유 선생과 연민 이가원 선생으로부터 지어재(之於齋)와 인재(仁齋)라는 아호를 받았다. 연세대 국학연구원·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연세대·강원대·경찰대·공주교대 등에 출강했으며, 잠시 서정대 교수로 재직했다. 지금은 충북대 우암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동안 조광조 평전인 ≪위대한 개혁≫과 ≪삼봉 리더십≫을 비롯하여 ≪하서 김인후의 시문학 연구≫·≪하서 시학과 호남 시단≫·≪한국시가의 정신세계≫·≪한국시가의 자연관≫·≪한문학의 이해≫·≪정보사회의 언어문화≫·≪화랑세기≫·≪동몽선습 외≫ 등 90여 편의 논저를 냈다. 우리나라 한문학과 동양고전 전반에 걸쳐 관심을 갖고서 연구하고 강의하고 저술하는 즐거운 두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